제 38 장 만검(卍劍)
신검산장의 신검각(神劍閣)은 풍철영의 거처다. 풍철영의 조용하고 나서지 않는 성격에 어울리게 신검각은 연못 가운데에 있었고, 은둔자(隱遁者)에게 필요한 고요함이 있었다. 이곳에는 조국명조차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그곳에 외부인이 발을 디딘 것은 거의 오년만이었다.
조국명은 장주에게 청년을 안내하고 장주와 청년이 인사를 나누는 것을 보며 물러났다. 장주는 저 청년과 많은 시간을 같이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조용하던 신검산장이 기지개를 펴는 발단이 될 것이다.
풍철영은 자신의 앞에 고요히 앉아있는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 속에서 한 인물을 끄집어냈다. 자신보다 나이는 별로 많지 않았지만 투박한 사내다움이 매력적이던 인물. 얼핏 닮은 것 같았다. 사내다운 투박함은 다소 사라지고 둥근 눈매가 여린 느낌을 주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확실히 닮아 있었다.
“만(卍)의 의미를 아시는가?”
풍철영은 불쑥 물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물음에 담천의는 의혹스런 기색을 떠올렸다. 그의 물음은 뜬금없는 것이었다. 만(卍)은 불교의 상징(象徵)이고, 사찰(寺刹)을 나타내는 표식(標式)이다. 그의 표정에서 아직 알지 못한다는 기색을 읽은 풍철영은 다소 실망스런 기색을 떠올렸다.
“자네는 천중무극검을 익히지 않았던가?”
그 말에 담천의는 자신이 과연 천중무극검을 익혔다고 할 수 있는지 생각했다. 또한 그 검을 완전히 익혔다면 강명이란 사내에게 패했을지 생각했다. 그것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천중무극검은 끝이 없었다. 끝이라고 생각하면 또 다시 다른 길이 열렸다. 어디까지 가야 익혔다고 할 수 있을까?
“익힌 것이 아니라 흉내만 냈소. 깨달은 것이 아니라 기교만 떠올렸을 뿐이오.”
어쩌면 맞는 말일 수도 있었다. 이 청년이 천중무극검을 대성하였다면 분명 만자의 의미를 알 터였다. 아직 그 끝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는 말을 이었다.
“만 자는 불타(佛陀)의 백호(白毫)가 우선(右旋)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네. 불타의 가슴에도 만 자의 형상이 나타난다고도 하지. 또한 밀교(密敎)에서는 태양신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네.”
백호(白毫)란 눈썹 사이에 난 가느다란 흰 털을 의미한다. 문자라고 보기보다 기호라고 생각되는 만자는 불타 이전에도 있어 왔을 것이나 불가에서는 만에 대해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 또한 밀교는 불교의 한 종파로 경전의 해석이나 선(禪)에 대한 수행방법 등이 달라 이단으로 배척되기도 하나 그것은 기존 이론에 대한 불경(不敬)은 될지언정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종교는 아니다.
“불가(佛家)에서는 그것을 길상해운(吉祥海運), 길상희선(吉祥喜旋)의 의미로 해석하고 만덕(萬德)의 상징으로 표현한다네. 그리고 만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비쳐볼 수 있는 초월적 능력이 있다고도 하지.”
풍철영은 무언가 저 청년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그가 말이 많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는 저 청년에게 건네 줄 그것을 자신이 보관하는 그 순간부터 만자의 의미를 알고자 노력했다. 만(卍)에 대해 많은 지식은 얻었지만 정작 깨달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도움은 주고 싶었지만 정작 자신이 그에게 도움을 줄 아무 것도 없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그는 허허롭게 웃었다. 어쩌면 지금 이렇게 도움을 주고자 말해주는 것이 오히려 그의 깨달음에 방해가 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깨달음에 있어서 가장 먼저 방해되는 적은 선입관(先入觀)이다.
“본 장주가 실수를 했군. 스스로 아무 것도 모르면서 방해만 할 뻔 했다네. 잊어버리시게. 굳이 설명을 했던 것은 자네에게 주어야 할 물건이 만검(卍劍)이기 때문이었네.”
그는 말과 함께 두께가 한자나 되는 둥그런 탁자의 모서리를 잡더니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중으로 되어 있는 탁자가 서로 비껴 돌기 시작하더니 활짝 핀 연꽃 모양의 위탁자가 열리며 한 자루의 검이 모습을 나타냈다. 교묘한 기관장치였다. 그것은 한 치의 틈도 없이 탁자 속에 끼어 있었는데 풍철영이 손을 뻗자 허공에 스스로 움직여 풍철영의 손에 잡혔다. 격공섭물(隔空攝物)의 공부다.
“이것이 자네가 찾으러 온 만검이네.”
그는 담천의에게 한 자루의 검을 건넸다. 오래된 듯 푸른 녹이 군데군데 쓸어있는 검집은 볼품이 없었다. 무게 역시 보통의 검보다 오히려 가벼운 듯싶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이한 것은 검신(檢身)과 검파(劍把:검의 손잡이) 사이에 있는 검동(劍銅)이었다. 그것은 검을 쥔 손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보통 둥그런 형태를 띠기 마련이었다. 헌데 이 검은 달랐다. 검동은 기이하게도 만(卍) 자 형태로 되어 있었고 사방의 끝은 둥글게 처리되어 있었다.
담천의는 검을 뽑아 들었다. 탄력이 느껴지는 연검(軟劍)의 일종이었는데 허공에 수평으로 뻗어도 휘어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주 부드러운 연검은 아니었다. 길이는 보통의 검보다 약간 긴 듯 했는데 폭은 오히려 약간 좁았다. 특이한 것은 검신의 중앙(劍背)은 무언가 칠을 해 놓은 듯 검은 빛을 띠고 있는데 반하여 양쪽의 검날은 빛을 받아 일렁거렸다.
“매우 좋은 검 같소.”
담천의는 자신의 손에 달라붙는 듯한 감촉에 만족스런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검배(劍背)에 그어진 검은 색은 칠을 해놓은 것이 아니라 깨알 같은 글씨로 만자를 새겨 놓은 것임을 그제야 알았다. 이검을 만검이라 한 이유가 검동이 만자로 되어 있고, 검배에 검은 줄을 쳐 놓은 듯이 그려진 문양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만자를 새겨 넣은 것 때문인 것 같았다.
“이 검은 만공(卍空)이란 승(僧)도 속(俗)도 아닌 기인(奇人)이 만든 검이라고 하는데 자네가 익힌 천중무극검의 요결(要訣) 역시 그 분이 남긴 것이라 전해지지.”
이제 전할 말은 다 했다. 자신이 아는 것은 모두 말했다. 더 이상 전할 말도 없다. 그 뒤의 결과는 오직 이 청년에게 달렸다. 깨달음이란 누군가가 빌미를 제공할 수는 있지만 대신 깨달아 줄 수는 없다.
“이렇듯 훌륭한 검을 주셔서 감사하오. 어찌 보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소.”
담천의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기이하게도 그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검이었다. 기억에는 없지만 아주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검인 것 같았다. 느낌 역시 친숙하여 그는 마치 원하는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기쁜 빛을 감추지 않았다. 무릇 검을 익힌 자가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검을 얻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단지 보관만 했을 뿐이지. 하지만….”
풍철영은 홀가분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지금과는 달리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보관했다가 돌려주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네. 그래서 본 장주는 자네에게 그 대가를 받아야겠네.”
“……?”
“지금 본 장 안에는 매우 재미있는 사람들이 들어와 있다네. 본 장주는 그들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지만 더러는 그런 것을 무시하는 손님도 있기 마련이지. 본 장주는 이곳이 시끄러워지는 것을 싫어한다네. 자네가 본 장주를 도와주시겠나?”
담천의는 기이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가 이런 부탁을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앞에 있는 풍철영 역시 사부와 관계가 있는 자다. 그는 서둘지 않고 서서히 사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마음먹었다. 지금까지는 아무 것도 모르는 가운데 휩쓸려 왔지만 이제는 알면서 휩쓸리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소?”
담천의가 호쾌히 승낙하자 풍철영은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우선은 이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해 주어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처리할지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에게는 동생을 치료하는 문제가 있었다. 갈유는 지금까지 풍철영이 해왔던 방식을 당분간 시행하겠다고 했다. 그것은 그의 공력을 소모시키고 주의력을 분산시킬 수 있는 일이었다.
어차피 그는 담천의의 판단력과 처리능력을 알아야 했다. 그것을 판단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조국명이 도와주면 이곳을 잘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리 어려울 것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담천의가 필요한 이유는 그가 움직일 때 비로소 신검산장 안의 모든 힘이 응집될 것이다.
“이제부터 이 신검산장의 장주는 두 사람이 될 것이네. 바로 노부와 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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