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명이 그녀에 대한 그의 사랑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그는 그 아이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속한 조직을 떠날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들을 갈라놓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두 사람을 더욱 불행하게 만들었다. 조국명은 탄식을 터트렸다.
“그는 아직도 자네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녹색모자(綠幅)를 썼다고 놀림을 받는 자가 무슨 일이던 하지 못하겠나? 돈으로 살 수 있는 최고의 무인들도 샀지. 아직까지 자네가 그들에게 발각되지 않았던 것은 천우신조(天佑神助)라 할 수 있어.”
녹색모자(綠幅)를 썼다는 말은 아내가 서방질을 했다는 표현으로 사내들에게는 가장 치욕적인 욕이었다. 더구나 돈깨나 있고, 그 지방의 토호라면 더욱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일이었다.
“만약 그 자가 소제 앞에 나타난다면 전과 같이 다리 하나 부러뜨리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오.”
조국명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벌써 황원외가 이곳으로 왔다는 사실을 그 자가 알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지금까지 그 자의 이목을 흐려 놓은 것은 조국명이었다. 황원외와 같이 있는 그녀는 자신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국명은 그들을 대놓고 감쌀 수는 없었다. 잘못한 것은 그 두 사람이었다.
이미 혼인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간 것은 가문의 치욕이 될 수 있었다. 설사 그들이 어려서부터 사랑했고, 혼인한 후에도 그녀의 눈 그림자 속에 맺혀 있는 것이 남편이 아니라 그 사내라 하더라도 도망가서는 안 되었다. 같은 침실을 쓰는 아내가 목석과 다름없고, 다른 사내를 생각하는 것을 참을 남편은 없었다. 마음을 돌려보려 애를 쓰다가 처음에는 욕설을 하고, 그것도 안 되어 때리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같은 사내로서 이해될 수 있는 일이었는지 몰랐다. 적어도 아내가 사랑하는 사내가 어떤 자였는지 정확하게 몰랐을 때 까지는 말이다.
그는 참으려했다. 들려오는 말들을 듣지 않으려 했다. 거짓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갑작스런 충동에 못 이겨 찾아간 그녀는 남편에게 맞고 있었다. 남편이 때리는데도 그녀는 아무런 반항이나 말도 없이 입술을 꼭 깨문 채로 맞고 있었다. 그는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그 자를 죽이고 싶었지만 다리 하나 만을 부러뜨리고 그 길로 그녀를 안아들고 떠났다.
“어차피 네놈이 걸머지고 가야 할 운명이겠지.”
조국명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어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는 일순간의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화를 낸 것에 대해 담천의와 두칠에게 사과했다. 손님을 모셔두고 할 말은 아니었다. 칠년 만에 만난 황원외에게도 그리 화낼만한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동생의 불행은 그들 사이를 갈라놓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낸 그 순간부터 시작이었다. 시간이 가면 마음이 돌아설 것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잘못도 있었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담천의에게 시선을 돌렸다.
“추태를 부려 죄송하오. 담공자. 장주께 모시겠소.”
그의 말은 다시 본래의 그로 돌아왔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총관이란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손님에게 화내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폐를 끼치게 되었소.”
담천의는 조국명을 따라 빈청(賓廳)을 나섰다. 하지만 남아 있는 두칠과 황원외는 이곳의 손님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곳의 식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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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장천은 새벽에 일찍 눈이 떠졌다. 사실 나이가 들면서 새벽잠이 없어서인지 그는 항상 해가 뜨기 전 일어났다. 밤새도록 잠을 제대로 못 이루어서인지 그의 뒷머리가 찌근거려왔다. 밀마를 남겨 연락을 해 와야 할 흑요에게서 연락이 끊겼다. 이곳에 들어 온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준 기한은 이미 지나갔지만 광지의 일행이 동착하는 오늘 오전까지 찾아낸다면 방법은 있을 터였다.
흑요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과 함께 그들의 끈이었다. 모든 정보와 연락을 하는 줄이었다. 아마 그녀는 지금쯤 수하들과 함께 필사적으로 신검산장의 지하로 들어갈 방도를 찾을 거였다. 어쩌면 벌써 잠입에 성공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안 오는 것일 수도 있었다.
더구나 흑모전서 균달 역시 벌써 여덟시진째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제 곧 새벽의 여명이 터올 터였다. 두세시진 후면 구파일방의 인물들이 들이 닥칠 것이고, 그들이 지금 최대한 막으려 하는 그것을 조사하게 될 터였다. 그래서 그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으니 새벽의 공기를 맡아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는 조용히 침상을 벗어났다. 뒷목이 여전히 뻐근했다. 기지개를 켜고 그는 옆방의 금적수사 부부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운봉소축의 문을 열고 앞마당으로 나섰다. 초겨울의 새벽 공기가 품속을 파고들었다. 서늘한 느낌과 함께 그는 오히려 상쾌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그는 상쾌한 아침 공기와 함께 코를 자극하는 피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그의 선천적인 감각은 곧 바로 그 피 냄새가 어디에서 나는지 찾아냈다. 운봉소축의 매화나무 아래 검은 그림자가 비추는 곳이 진원지였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 누워있는 자가 누구인지 금방 알았다.
(균달….!)
그의 신형이 삼장 정도의 거리를 단숨에 미끄러져 나아갔다. 피 냄새가 더욱 짙어졌다. 섭장천은 이목을 최대한 높여 주위에 다른 인물들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의 감각은 오장 내에는 아무도 없음을 알렸다. 그제야 그의 가슴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왔다. 균달이 죽었음은 이미 누군가가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더구나 그의 시체가 놓여 있는 곳은 공교롭게도 흑요가 자신에게 밀마를 남기는 바로 매화나무 아래였다.
그는 균달의 시신을 보고는 시신만이라도 치워야겠다는 생각을 포기했다. 균달의 몸은 일곱조각으로 잘려져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강호에서 평생을 살아왔다 하더라도, 아무리 죽음을 언제나 곁에 두고 살았다 하더라도 사람의 몸이 깨끗하게 일곱조각으로 잘린 시체를 보고 놀라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가슴이 또 한번 덜컥 내려앉았다. 그의 뇌리로 찰라간 이곳에 와 있다던 철혈보의 인물 중 일월신륜 육능풍과 냉혈도(冷血刀) 반당(班堂)이 떠올랐다. 육능풍의 월륜과 반당의 도라면 이렇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했듯이 그들 역시 자신들을 파악하고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섭장천은 곧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아니었다. 병기에 의한 상처는 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미세한 차이이지만 병기에 의해 절단된 부위는 처음과 끝이 달랐다. 아무리 고수라 하더라도 처음 베어지는 곳과 베고 나가는 흔적이 다르게 나타난다. 이렇듯 처음과 끝이 고른 흔적을 보이는 것은 병기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균달은 항상 면철지영(緬鐵之英)으로 만든 팔뚝까지 올라오는 수투(水套)를 끼고 있었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의 명성도 그리 빛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얇았지만 웬만한 충격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는 것이었다. 헌데 균달의 팔목은 잘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면철지영으로 만든 수투를 찢을 만큼 예리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의 뇌리로 한 단어가 떠올랐다.
(쇄금사(碎金絲)…!)
나무 정도는 두부 베어내 듯 잘라 버린다는 실(絲). 오죽하면 금속을 부순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랴. 그것이 아니라면 이토록 정교하게 사람의 몸을 일곱조각으로 만들 수 없었다.
그는 탄식했다. 일이 틀려진 것이다. 균달은 친구의 복수를 해 주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믿고 자신을 위해 필사적으로 이곳 지하를 들어가려 노력했을 것이다. 그에게 호승심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지하는 그의 세계였다. 자신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 그는 승부를 걸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쇄금사에 의해 전신이 일곱조각으로 변했을 것이다.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가운데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사실은 균달이 이곳에서 일곱조각으로 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누군가 분명 이곳으로 운반해 온 것이다. 섭장천 그 자신이 잘 볼 수 있도록 가져다 놓은 것이다. 이곳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이곳의 주인이었다. 그는 자신들에 대해 경거망동을 하지 말라고 처음 경고를 보낸 것이다. 더구나 매화나무 아래에 균달의 시신을 갖다놓은 것은 흑요를 비롯한 수하들의 움직임도 파악하고 있으니 균달과 같이 되고 싶지 않으면 더 이상 움직이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의 불길한 예감은 점차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이 신검산장은 무서운 곳이었다. 모습을 나타낼 수 없는 제약을 가졌다 하더라도 왜 그 아이들이 풍철한을 놓쳤는지 이해되었다. 풍철한에게는 보이지 않은 방수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런 정도가 아니었다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기 전에 처리했을 것이다.
그는 갑작스럽게 구토가 올라옴을 느꼈다. 어제 저녁까지 은밀하게 말을 나누던 균달의 시체 때문은 아니었다. 신경이 곤두선 가운데 그는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결국 그것 때문이었다. 일년 중 한달의 기간, 그들이 역혼기(逆魂期)라고 부르는 고통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이었다. 열흘이 채 남지 않았다. 그는 빠른 시일 내에 안정할 곳을 찾아야 했다. 정해진 양의 앵속(罌粟)과 특별히 만든 단약을 먹고 한달 정도의 기간을 꿈을 꾸듯 자면서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
이제는 최악의 경우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희생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아직 결정을 내기에는 이른 감이 있었다. 일단은 흑요의 안전부터 확인해야 했다. 균달이 죽었다는 사실은 흑요에게도 문제가 발생했다는 추측이 가능했다. 물론 흑요의 능력은 균달과 다르다. 그녀에게는 특이한 능력이 있었고, 그 능력이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자신의 몸 하나 빼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그는 생각을 끊고 뒤를 바라보았다.
“노야. 괜찮을 겁니다.”
포권을 취해 인사를 드리는 자는 문사건을 쓴 사내였다. 그 역시 섭장천의 뒤를 따라 나온 모양이었다. 그 역시 섭장천과 같은 생각을 한 표정이었다.
“정소청(程昭淸). 자네는 정말 흑요가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는 스멀스멀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애써 누르고 있었다. 균달의 죽음도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렇게 죽이려고 거두어들인 것이 아니었다. 균달 역시 어려서부터 상처받은 영혼이었다. 그가 걸어온 길은 옳지 않은 것이었지만 이제부터 그는 보람된 일을 할 수 있었다.
“오늘 안으로 연락은 될 것입니다.”
정소청 역시 긍적적인 대답이 없는 것은 그의 신중함 만은 아니었다. 지금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면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추진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 진행되어 왔는데 왜 일이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 아이들이 풍철한을 놓치는 실수를 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만회할 수 있는 문제라 생각할 수도 있었다. 풍철한이 이 신검산장과 관계가 있는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들이 원하던 계획을 더욱 쉽게 추진할 수 있었다. 문제는 두 번째 이유였다. 이 신검산장의 무서움을 전혀 몰랐었다는 점. 이곳이 용담호혈(龍潭虎穴)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모든 것이 어렵게 흘러가고 있었다.
본래 계획했던 일이 꼬이면서 위험한 일이 되었다. 어쩌면 목숨까지 담보해야 할 위험한 일이었지만 섭장천은 본래 계획 했던 대로 밀고 나가려는 생각을 굳혀가고 있었다. 그의 친구가 폐인이 되어 버렸던 그 순간에 자신도 이미 죽었던 목숨이었다. 그 뒤로 고통스런 삼십년의 세월을 더 살아 왔지만 어차피 덤으로 산 인생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불안감도 가시고 있었다. 하지만 못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균달의 시신조차 수습해 주지 못하는 안타까움이었다.
(미안하네. 자네는 나를 위해 죽었는데 내가 자네에게 해 줄 것은 아무 것도 없네 그려. 하지만 내가 자네에게 약속했던 일 만큼은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반드시 해주겠네.)
그는 균달의 조각나 있는 시신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알지 못할 분노가 서서히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제37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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