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게 진걸이! 어서 나오게나!”
비가 주적주적 오는 늦은 아침, 안첨지는 이진걸을 사납게 불러내었고 작은 움막 같은 집에서 몸을 부르르 떨며 이진걸이 엉거주춤 기어 나왔다.
“이제야 일이 생겼네! 어서 채비를 하게!”
이진걸은 안첨지의 말에 진탕에 굴러 떨어진 짚신을 주워 보이며 잔뜩 찌푸린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날씨를 따질 참인가! 그간 3명이 놀고먹은 게 있는데 이제는 슬슬 움직여야 하지 않겠나?”
“비가 내리는 것도 그렇지만 찬바람도 세니 노상에서 잠이라도 들면 그대로 얼어 죽으란 말이네? 이거이 야박하구만!”
실제로 남한산성에서는 새벽부터 내린 비에 옷을 적신 채 성위에서 파수를 서다가 병사들이 얼어 죽는 비참한 일이 벌어졌다. 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비를 맞아가며 향을 살라 통곡하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었는데 이는 병사들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이거 고생시킨 대가는 나중에 더 받아야갔어… 대체 뭘 시킬 것이네?”
“성에서 사람을 또 보내었다네, 그를 추격해 베어 오게나.”
“기런 일이라면 성 밖에 있는 청나라 오랑캐들이 알아서 하딜 안갔어?”
“시끄럽네! 이번에 성 밖으로 나간 자가 누구며 무엇 때문에 나갔는지 아는가?”
“알게 뭐네?”
“장판수라는 자가 전라도로 원군을 청하고자 성 밖으로 나갔네.”
이진걸은 바로바로 받아서 쏘아대던 말을 멈추고 한숨을 쉬었다. 안첨지는 그런 이진걸을 보며 입가에 웃음을 지어보였다.
“기렇단 말이디…. 내래 장판수란 이름을 당연히 기억하고 있디…. 안첨지 니래 정말 독하고 나쁜 놈이야.”
홍명구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직후 안첨지는 혹시나 장판수가 일의 내막을 캐내려 들어서 자신에게 그 해가 미칠 것을 염려했다. 그렇기에 이진걸을 시켜 장판수를 없애려 했지만 원래 제멋대로인 이진걸은 평양으로 가버린 뒤였고 안첨지의 주위에는 쓸만한 칼잡이가 없었다.
안첨지에게는 다행히도 장판수는 자신의 삶에 쫓겨 지난 일을 돌아보지 않았지만 후에 갑사로 임용되었다는 소식에 불안함을 가졌고, 남한산성에 와서도 장판수가 있는 서쪽성문으로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결자해지(結者解之 : 처음 일을 시작한 사람이 끝을 맺는다)가 무슨 말인지 알겠지?”
“나쁜 삿기….”
“골치 아픈 놈이야.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잠시 대장이 되었고 일부는 왕보다 장판수를 더 믿고 따르니 말일세. 농간을 부려 그 놈을 성 밖으로 내보내긴 했지만 결국 일을 마치고 돌아올 놈이네.”
“장판수래 능히 그럴 놈이디. 내가 가르친 놈인데 기렇고 말고. 하지만 걱정 놓게나. 일이 힘든 만큼 웃돈만 더 주면 처리 하갔어”
“자네 혼자서 감당하겠나? 성 밖에서 오랑캐들을 상대로 싸웠다는 소문을 들어보니 혼자서 열을 상대할 자라더군.”
“그 말을 믿네? 원래 소문은 과장되는 기야. 그리고 얼뜨기 같은 놈들은 필요 없다우. 내래 혼자서도 가뿐 하디.”
안첨지로서는 과장된 소문보다 이진걸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오는 길에 한명, 계화를 놓아주느라고 또 한명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죽여 버린 이진걸이었고 거기에는 잔인한 습성이 숨어 있었다. 이진걸의 기분에 따라 상대의 목숨이 좌지우지 되는 버릇이었다. 안첨지는 이를 알기에 없는 소리까지 지어내었다.
“한 가지 말해두지만, 장판수는 자기 스승은 없다고 말하고 다녔다네. 모든 게 자기가 잘나서 깨우쳤다고 하는구만.”
안첨지가 은근히 이진걸을 도발하는 말을 했지만 이진걸은 무덤덤하게 지껄일 뿐이었다.
“내래 직접 물어볼 테니까 그딴 말 뇌까리지 말라우. 여장을 챙기고 나올 테니 조금 기다리라구.”
이진걸이 방으로 들어간 후 안첨지는 괜히 진흙에 나있는 발자국을 신바닥으로 문질러 덮어보았고 그 위를 빗방울들이 다시 두드리며 얕고도 작은 구멍을 만들어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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