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선생님하고 밥을 같이 먹어요?"

'하자'와 '하지 마라'

등록 2005.04.09 08:30수정 2005.04.09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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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동안 모둠별로 점심을 같이 먹었다. 식당 맨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아 대화의 꽃을 피워가며 밥을 먹다보니 문득 한 식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을 먹고 난 뒤에는 도서관으로 가서 폭신한 소파에 앉아 책 이야기를 했다. 적어도 한 달에 한 권 이상 책을 읽기로 약속하고 책 이름도 써낸 터였다.

"책 얼마나 읽었어?"
"두 장이요."

"열흘 동안에 겨우 두 장?"
"선생님, 저 정말 책 읽기 싫어요."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책하고 친해봐."
"안 읽으면 안 돼요?"

"안 읽으면 네 손해지 뭐. 싫어하는 것이 많을수록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거니까."

모둠별로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을 때 "왜 선생님하고 밥을 같이 먹어야 해요?" 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던 아이도 바로 연지(가명)였다. 나는 좀 어이가 없어서 "넌 선생님하고 밥을 먹는 것이 그렇게도 싫으냐?" 하고 조금은 거칠게 대꾸를 하고 말았다.


그러자 연지는 좀 미안했는지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무 과민한 반응을 보인 것 같아서 나도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고맙게도 때마침 이런 말을 해주는 아이가 있었다.

"선생님하고 밥을 같이 먹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라요, 평소 안 하던 일이라서 궁금해서 물어본 걸 거예요."


그 말을 듣자 나는 연지에게 더욱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음의 화장을 다시 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연지와 아이들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이 왜 여러분과 밥을 같이 먹으려고 할까요?"
"저희들과 친해지려고요."

나는 대답을 한 아이에게 환한 미소를 보여주고 눈길을 연지에게 돌렸다. 그러자 연지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하자고 하면 일단 싫은 기색부터 보이는 아이들이 있다. 아니, 누구랄 것도 없이 요즘 아이들의 공통된 모습이기도 하다. 왜 그럴까? 그것은 혹시 그동안 아이들이 우리 교사나 어른들로부터 '하자'보다는 '하지 마라'는 말을 더 많이 들어온 탓은 아닐까?

지각하지 마라. 흡연하지 마라. 거리를 배회하지 마라. 무단 외출하지 마라. 이성끼리 손잡고 다니지 마라. 머리를 기르지 마라. 목걸이를 하지 마라. 심지어는 파란색이나 노란색 운동화를 신지 마라.

이런 금기사항 중 대부분은 학교를 졸업하면 자연히 풀리게 되어 있다. 문제는 아이들이 곧 만나게 될 사회가 하지 말라는 것만 하지 않으면 되는 그런 만만한 곳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그런 소극적인 방어만으로 인간이 행복해질 수는 없을 터이다. 학교에서 생활검열이 있던 다음 날, 나는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어제 걸린 친구들은 스스로 알아서 고치세요. 머리나 복장 문제로 여러분과 죽기 살기로 싸우고 싶지 않아요. 여러분도 죽기 살기로 하려고 하지는 마세요. 세상에는 그런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고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것들이 많아요. 저는 여러분에게 하지 말라는 말보다는 하자는 말을 더 많이 하고 싶어요."

그날 생활검열에 걸린 아이들을 크게 나무라지 않은 대신 그들에게 '하자'고 제안한 것이 바로 책 읽기와 등산이었다. 그런데 책도 책이지만 등산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을 찡그리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 중 한 아이에게 다가가 넌지시 물었다.

"넌 산이 싫어?"
"전 산보다는 바다가 좋아요."

"난 바다도 좋고 산도 좋은데. 둘 다 좋아하면 행복이 두 배가 되잖아."
"그래도 산은 싫어요."

"그래? 아, 좋은 수가 있다. 바다가 보이는 산에 가면 되겠네!"

그런 억지스런 대화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점심시간에 한 식구처럼 밥을 같이 먹다가 마음이 변한 것인지, 며칠 뒤 반장이 가져온 등산 희망자 명단에는 그 아이의 이름도 눈에 띄었다. 그 아이는 자신의 행복을 향하여 한 걸음을 더 내딛은 셈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경향신문 교단일기에 기고한 글을 일부 깁고 보탰습니다.

덧붙이는 글 경향신문 교단일기에 기고한 글을 일부 깁고 보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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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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