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 장 무살무도(無殺無刀)
청송자는 운기를 마치고 눈을 떴다. 역시 내력으로 막혀있는 혈을 타통 시키고 세맥까지 일일이 진기가 미치게 하는 것은 엄청난 공력의 소모를 가져왔다. 한두 번 정도야 그럴 수 있다지만 그것을 열흘 넘도록 해온 풍철영의 내공이 얼마나 정순한가를 새삼 느끼는 청송자였다.
“고생하셨소. 사형.”
풍철영은 내심 미안했다. 청송자는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거의 풍철한의 곁을 지켰다. 광지선사 등이 모두 백화각에 머물러 있음에도 그는 풍철영이 한계에 다다른 것을 알고는 자신이 대신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는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몰랐다.
“이제 말해 줄 때도 되지 않았나?”
청송자의 말에 풍철영은 잠시 머뭇거렸다. 어차피 알려지게 될 일이지만 그 뒤의 결과는 그가 원했던 상황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틀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풍철한을 생각해서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말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삼년전 항산검파(恒山劍派)가 하룻밤 사이에 멸문 당한 일을 사형도 아실 것이오. 소제는 그 일이 마음에 걸려 계속 조사해 오고 있었소.”
산서성 북쪽에 위치한 항산(恒山)에 자리한 항산검파는 한때 무림 오대검파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성세를 누렸던 문파. 하지만 원(元) 말 패퇴하는 원군들과 자주 부닥치면서 많은 문인들이 죽고, 겨우 명맥만 이어가면서 부흥시키려 노력했던 곳이었다. 그런 항산검파가 장문인을 비롯 문도 오십여명이 하룻밤 사이에 참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철한이는 흉수가 누군지 알았던가 싶더이다. 하지만 연락이 끊겼고, 갑작스럽게 가군영과 함께 이곳에 와서는 의식을 잃어 버렸소. 죽은 가소제의 시신이 이상하게 변하고 철한이까지 변해가는 것을 보고 황급히 사문에 연락했던 것이오.”
항산검파의 참살은 구파일방에서도 조사한 바 있었지만 단서를 찾지 못했다. 아니 구파일방은 조사를 하다말고 모든 사실을 덮어 버렸다. 무림인들은 의혹스러웠지만 국경을 넘나들던 혈랑대의 소행일 것 같다는 의견만을 제시한 채 성대히 장례를 치러 주고는 끝이 났던 사건이었다. 이유는 항산검파 문인들의 시신에서 구파일방의 무학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자들이라던가?”
“듣지 못했소. 그가 깨어나야 알 수 있을 것이오.”
풍철영은 아직 밝힐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지금 밝힌다면 더욱 일이 꼬일 수도 있었다. 좀 더 확실하게 조사가 된 다음에 밝혀야 할 일이었다. 그 때 휘장 너머로 갈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와 보시겠소?”
풍철영과 청송자는 휘장을 젖히며 갈유에게 다가갔다. 갈유는 가군영의 시신을 붙잡고 살펴본 지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갈유는 가군영의 시신을 훼손할 수밖에 없다고 했고, 죽은 자에 대한 예의는 아니었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다. 풍철한을 살리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시검사도의 원인이 밝혀져야 대응할 방도도 나올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갈유는 이미 가군영의 전신을 갈라놓은 상태였다. 목 아래부터 배꼽 아래까지 벌어져 있었고, 팔과 다리도 열어 놓은 곳이 많았다. 갈유의 손끝이 가군영의 갈라진 팔뚝을 가리켰다.
“사인은 피에서 생기는 화농이오. 화농이 혈맥의 흐름을 막고, 종래에는 피부부터 죽어가는 것이오. 하지만 피가 돌지 않는 곳은 썩어들어 가는 게 정상인데 딱딱하게 굳어가는 원인을 알 수 없소.”
그들의 눈에도 팔뚝 속 갈라진 핏줄 속에서 흘러나온 피와 그 속에 섞인 누런 농(膿)이 보였다.
“발열이 원인일 수 있지만 과연 무엇이 이런 화농을 만들어내고 피부를 나무껍질처럼 만드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소.”
갈유의 실망스런 기색에도 풍철영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갈유는 천하명의였다. 최소한 결정적인 사인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아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만 주어진다면 나머지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까지 감춰졌던 비밀이 풀릴 수도 있었다.
“일단 화농을 없애고 피를 맑게 하는 것이 중요하오.”
갈유는 종이에 약재의 이름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꽤 많은 종류였는데 그렇다고 특별히 못 구할 약재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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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운기조식(運氣調息)하는 것은 그의 버릇이었다. 새로운 기운을 받아들이고 풀어져 있는 근육들을 적당하게 긴장시키는 것은 하루를 시작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과였다. 몸은 어느 정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느 순간부터 그의 귀를 거슬리게 하는 소리로 인해 서둘러 조식을 마쳤다. 그는 문을 열고 소리 나는 곳을 향했다.
가까이 갈수록 소리는 확연해 졌다. 분명 연마석(硏磨石)에 칼을 갈고 있는 소리였다. 해도 뜨지 않은 이른 새벽부터 칼을 갈고 있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고 누구에게나 호기심을 일으키는 일이었다. 그는 걸음을 옮기다가 낯익은 인물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앞에는 소 한 마리가 양쪽 나무틀에 끼인 채 매어 있었고, 한쪽 구석에서는 몸집이 왜소한 노인이 칼을 갈고 있었다.
(황원외… 저 사람이 왜…?)
그가 의문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황원외의 안령도(雁翎刀)가 한줄기 가느다란 섬광을 뿜었다. 그 뿐이었다. 언제 발도(拔刀) 했는지 느낄 사이도 없이 그의 도는 도집에 들어가 있었고 그의 앞에 메어져 있던 소는 무슨 일인지 몰라 눈을 끔뻑이더니 다리를 꺾었다.
움----머----!
그뿐이었다. 소 울음 소리가 한번 울리더니 소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어둠 속이었지만 그는 산에서 본 멧돼지가 떠올랐다. 똑같았다. 정수리에 난 손가락 한마디 크기의 작은 상처. 칼을 갈던 노인이 칼 가는 것을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아니야….”
노인은 고개를 젓는 듯 했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왜소한 노인의 신형은 곧 바로 담천의를 향해 쏘아왔다. 본능적으로 그는 옆으로 비켜났고 언뜻 눈앞에 나타난 암영(暗影)과도 같은 도기(刀氣)가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팔랑---
그의 장포 끝자락이 베어지며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것을 느낄 사이도 없이 또 다시 파고드는 도기. 소리도 없고 빛도 없다. 살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강명이란 사내의 숨겨진 암검과도 흡사했다. 보이지 않다가 바로 눈앞에서야 그림자처럼 나타나는 그 검.
따--다---당----!
담천의는 검을 뽑지도 못하고 검집으로 급하게 파고드는 세 줄기 도기를 쳐냈다. 노인이 사용하는 도는 도도(屠刀)였다. 소나 돼지를 잡을 때 사용하는 것이 저것이었다. 노인은 공격을 하다말고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만검…?”
노인의 시선은 담천의의 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았다. 그의 주름살 가득한 얼굴에는 기이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말씀드린 그 사람입니다.”
황원외가 나직이 말하자 노인의 시선이 만검에서 담천의의 얼굴로 옮겨졌다.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고는 고개를 끄떡였다.
“닮긴 닮았군.”
그 뿐이었다. 노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담천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번 더 훑어보더니 한마디 던졌다.
“제법이야.”
노인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다시 연마석 앞으로 다가갔다. 담천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갑작스런 공격은 뭐고, 만검을 알아보고는 다시 칼을 갈고 있는 노인의 태도는 뭔가?
“노인장은 뉘시오?”
아마 왜 공격을 했느냐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물었다.
“네 녀석의 도와 노부의 도에 다른 점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황원외에게 물은 소리였다. 황원외는 고개를 끄떡였다.
“사부님의 도에는 살기가 없었습니다.”
“알긴 아는구나. 무인이라면 누구나 살기를 느낀다. 살기를 느끼게 하는 도라면 이미 상대에게 경각심을 주고 방비를 하게 한다. 아무리 빠른 쾌도라 하더라도 상대가 느낄 수 있다면 쾌도가 아니다.”
살기란 베겠다는 마음을 가질 때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운이다. 이미 발도할 때 살기를 느낀 상대방이라면 아무리 빠른 공격이라도 그 움직임을 느끼거나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살상병기를 쥔 자가 어찌 살기를 가지지 않을 수 있으랴! 어찌 상대를 베겠다는 자가 살기를 표출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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