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우리는 밭이 없어?"

등록 2005.04.16 12:39수정 2005.04.17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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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묵정밭을 일구는데 올해는 우리집 녀석들도 한 몫을 단단히 했습니다.

묵정밭을 일구는데 올해는 우리집 녀석들도 한 몫을 단단히 했습니다. ⓒ 송성영

올해도 어김없이 밭을 일궜습니다. 8년째 갈아먹는 집 주변의 텃밭에는 상추며 쑥갓 아욱 등등 온갖 채소 씨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또 한군데의 밭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거기에다가는 겨우 내내 닭들이 모아준 계분을 버무려 보리감자를 심었습니다.


보리감자를 심은 새로운 밭은 3년 동안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던 묵정밭입니다. 오랫동안 묵혀 있던 밭이다보니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습니다. 10여 평에 불과한 밭이지만 다 일구는데 닷새나 걸렸습니다.

본래 느려터진 성품 때문이지만 쑥대밭을 죄 갈아엎기란 싶지 않은 일입니다. 밭은 쑥을 비롯한 온갖 잡초들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서두르지 않고 틈나는 대로 조금씩 캐냈습니다. 하루에 한 두시간씩 뿌리를 깨내는 데만 사나흘이 걸렸습니다. 캐낸 뿌리들은 밭을 뒤덮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보리감자를 심기 전에 흙과 계분을 버무리면서 나는 문득 밭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밭은 내게 사랑하는 애인이나 다름없습니다.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밭을 갑니다. 너무 많은 밭을 갈게 되면 부대낍니다. 일이 힘들면 밭을 사랑하기에 벅찹니다. 벅차게 되면 서로가 혹사당하기 십상입니다. 밭은 밭대로 농약에 혹사당해야 하고 내 몸은 몸대로 망가지게 됩니다. 기쁨보다는 고통이 더 많이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밭을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밭하고는 상관없는 서글픈 짝사랑입니다. 땅 한 평 없는 나는 언제나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은 밭을 짝사랑하고 있습니다. 나는 늘 몹쓸 약에 중독되어 따듯한 손길 한번 받지 못한 채 엉망진창으로 죽어 가는 밭을 만납니다.


나는 아픈 땅을 어루만집니다. 죽어 가는 밭은 내 손길과 땀으로 살아납니다. 삽으로 뒤집어 엎은 땅속 깊은 곳의 밭의 속살은 감촉이 참 좋습니다. 생명입니다. 나는 그 생명을 만지작거리다가 가끔씩 슬픔에 잠깁니다. 늘 그랬듯이 언젠가는 땅 주인에게 돌려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농약에 찌들린 묵정 밭을 갈아 농약은 물론이고 화학비료 한 방울 뿌리지 않고 계분이나 분뇨로 기름진 밭으로 만들어 놓으면 늘 땅 주인이 손을 내밉니다. 지난 7년 동안 두 번이나 그랬습니다. 이번이 세 번째 밭입니다. 2, 3년 잘 가꿔 놓으면 밭을 내놓으라 합니다. 그럴 때마다 화가 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나는 짝사랑하던 애인을 빼앗기듯이 눈물을 머금고 밭을 내줘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올해도 어김없이 미련 곰탱이처럼 또다시 맨손으로 땅을 일궜습니다. 비록 손바닥만한 밭이지만 밭을 일구게 되면 기분이 좋기 때문입니다. 밭은 내 지극한 사랑에 배신하는 법이 없습니다. 싹을 틔워 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줍니다. 열매를 주지 않아도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습니다.

내가 흙을 만졌을 때 기분이 좋은 것은 또한 사랑했던 사람들의 흔적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흙이 되었거나 흙이 되어가고 있을 사람들, 오래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입니다. 작년에 일찌감치 떠난 선배며 얼마 전에 떠난 처형 또한 흙이 될 것입니다.

흙은 내게 피와 살입니다. 흙은 나를 먹여 살리고 나 또한 흙이 될 것입니다. 영혼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살과 뼈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흙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녀석들도 언젠가는 흙과 한 몸이 될 것입니다.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앞서 살다간 모든 생명들은 그렇게 흙이 되었고 흙이 되어 내 앞에 있습니다.

올해는 제법 손목이 굵어진 아들 녀석들과 함께 밭을 갈았습니다. 초등학교 3, 4학년 된 녀석들의 일손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밭을 다 갈아 놓고 씨감자를 넣으면서 큰 아이가 스스로 대견스러워하며 물었습니다.

"이거 우리 밭여?"
"아니."
"아빠 우리는 밭이 없어?"
"아니."
"어딨는디?"
"정해진 밭은 없어."
"에이 그게 뭐여?"
"우리가 밭을 일구면 그게 우리 밭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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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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