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 그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들의 땅

등록 2005.04.21 15:50수정 2005.04.23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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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암리차르에서 육로로 국경을 넘어 파키스탄의 라호르로 넘어온 지 오늘로 꼭 일주일. 지난해 1월 중순부터 올해 3월까지 인도와 네팔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드디어 파키스탄, '순수의 땅'으로 들어섰다. 국경을 넘고 나니 달라진 점이 몇 가지 있다.

우선은, 거리의 간판 글씨가 변했다. 아라비아문자도 산스크리트문자만큼이나 읽을 수도 없고, 내용을 추측할 수도 없는 건 마찬가지라 별로 아쉽지는 않다.


사원에서 기도 중인 남자들. 와지르 칸 모스크. 라호르
사원에서 기도 중인 남자들. 와지르 칸 모스크. 라호르김남희
두 번째는 오토 릭샤와 트럭의 장식이 화려해졌다. 빈틈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그림과 온갖 잡다한 장식품으로 치장한, 총천연색의 차들은 그 자체로 볼거리이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우리 나라의 '이발소 그림'처럼, 나름대로 예술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요란한 그림과 장식으로 치장한 파키스탄의 트럭
요란한 그림과 장식으로 치장한 파키스탄의 트럭김남희
하지만 양철 장신구들을 '딸랑딸랑' 혹은 '덜컹덜컹'거리며 달리는 이 정신 사나운 차량들을 바라보노라면, 혹시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사회에서 이것만이 유일한 탈출구는 아닐까 싶어서, 그런 일탈의 욕구가 화려한 차량 장식을 양산해내는 건 아닌가 싶어서,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파키스탄에 오래 거주한 한 한국분이 이 차량 장식에 대해 이런 말을 해주셨다. 북부지역을 빼고는 기후며 풍경이 단조롭기 그지없는 지리적 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화려한 채색 차량이 발달한 것이라고).

세 번째로 힌두 사원이 사라지고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가 거리를 점령했다. 이슬람임을 증거하는 흰 모자를 쓴 사람들이 하루에 다섯 번씩 메카 방향을 향해 기도하고(호텔방에도 기도용 돗자리가 구비되어 있다), 모스크의 첨탑에서는 뮈에젠(기도 시간을 알리는 사람)의 코란 읽는 소리, 기도하는 소리가 아침 저녁으로 들려온다.

네 번째로 사람들의 옷차림이 변했다. 그 화려하고 다채롭던 색상의 사리는 사라지고, 이곳 여인들은 별 매력 없는 색상의 펀자비(긴 윗도리와 바지로 구성된 옷)를 입고 그 위에 스카프나 부르카를 둘러썼다. 남자들은 '샬와르 카미즈'라 불리는 역시 긴 원피스처럼 생긴 윗도리와 바지로 된 전통옷을 입고 있다. 색깔은 흰색이거나 대부분 어두운 무채색 계열이라 바라보는 즐거움이 없다.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하는 신자. 박샤히 모스크. 라호르
이슬람 사원에서 기도하는 신자. 박샤히 모스크. 라호르김남희
무엇보다 부르카. 나를 분노하게 하고, 흥분하게 하고, 이슬람에 대한 그 모든 호의를 연기처럼 날려버리는 부르카. 눈이 있는 얼굴 부분까지 촘촘한 그물망이 쳐 있어 도저히 얼굴을 들여다 볼 수도 없고, 그걸 쓴 여자들이 바깥을 제대로 볼 수나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부르카.


아무리 호의적으로 봐주려고 해도, 미적 감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이, 여자들의 사람 구실을 방해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만 같은, 의도가 의심스럽고 수상하기 그지없는 천 뭉치.

라호르나 이슬라마바드 같은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스카프로 머리를 가리지 않은 여자들을 보기 힘들다. 라호르 포트
라호르나 이슬라마바드 같은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스카프로 머리를 가리지 않은 여자들을 보기 힘들다. 라호르 포트김남희
파키스탄 남자들은 외국인 여성 여행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머리를 가리고 스카프를 쓰면 더 존중 받을 거야."

우리는 열심히 머리를 가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상체도 덮고, 엉덩이도 가린 채, 혹시나 우리의 불성실과 태만으로 순진무구한 남성들이 성적 유혹이라도 느낄까 노심초사하며 거리를 걷는다. 그러면서 가끔 분노한다.

"아니, 그럼 몸을 덜 가리면 존중을 덜 받고, 결국 그런 상태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건 여자 탓이라는 거 아니야? 정말 어이가 없네"라며.

스카프를 써 보기 전에는 '불편하기야 하겠지만, 뭐, 얼마나 불편하겠어? 그 정도야 기꺼이 감수하지' 이런 생각이었다. 하지만 스카프로 머리를 가리고 다니자니,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다. 더운 건 둘째치고, 내려오는 스카프를 치켜 올리느라 팔은 딴 일을 할 수가 없다. 등에 배낭을 메고, 어깨에는 카메라를 걸고, 그 위에 스카프를 두르고 돌아다니자면 사진 한 장 찍기도 힘이 들고, 겁이 난다.

사원에서 기도중인 파키스탄 남자들. 와지르 칸 모스크. 라호르
사원에서 기도중인 파키스탄 남자들. 와지르 칸 모스크. 라호르김남희
스카프를 쓰고 다니며 가끔식 나는 중얼거리곤 한다.

'여자의 머리만 보면 성욕을 느꼈던 미치광이 율법학자, 가슴과 머리와 몸을 가려 남자들을 자극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정신 나간 종교 지도자들에게 화가 있기를! 거룩한 알라와 예언자의 분노가 그들에게 미치기를!'

마지막으로, 인도를 벗어난 이후 생긴 가장 중요한 변화. 남자들의 친절도가 무한탄력을 받은 듯 엄청나게 상승했다. 인도의 델리에서 읽었던 정보노트에는 파키스탄을 여행한 사람들이 이런 말을 남겨놓았다.

"여자분들, 크리켓 방망이나 지팡이 들고 다니면서 엉덩이 만지는 남자들 죽여버리세요."
"엉덩이 만지는 남자에게는 무조건 따귀를 올려붙이세요. 그 자식이 뭐라고 변명하려고 들면, 다시 더 세게, 한 대 더 올려붙이세요."(정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두렵고 긴장된 마음으로 이 땅에 들어섰는데, 아직 단 한 건의 신체적 접촉도 없었다. 오히려 파키스탄으로 넘어온 이후 늘 과잉 친절에 시달려야 했다.

어딘가를 찾기 위해 거리를 서성거리면 곧 십수 명의 사람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그 중에 영어 몇 마디라도 하는 가방끈 긴 남자가 꼭 하나는 있어 해결사를 자처하고 나선다. 택시비를 안 받고, 차를 대접하고, 짐을 옮겨주고, 인터넷 사용료를 대신 내주려고 한다거나, 식사 초대를 하고, 관광안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늘 줄을 선다.

아무에게나 손 벌리기 좋아하던 옆 나라 사람들에 비해 자존심 강하고, 외국인을 환대하고, 손님 접대하기를 즐기는 파키스탄 남자들.
옆 나라 남자들은 접근했다 하면 주머니의 푼돈을 노리는 어설픈 사기꾼이거나, 어떻게든 한 번 즐겨보려던 속이 검은 남자들이 많았는데, 여기 남자들은 순수하고 친절한 호의가 앞서는 게 보인다.

카이버 바자의 노점상들. 거리의 상점이나 노점에서 장사하는 여자들을 보기란 쉽지 않다. 경제활동을 비롯한 사회생활은 철저하게 남자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폐샤와르
카이버 바자의 노점상들. 거리의 상점이나 노점에서 장사하는 여자들을 보기란 쉽지 않다. 경제활동을 비롯한 사회생활은 철저하게 남자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폐샤와르김남희
그런데, 이 모든 사람들이 죄다, 남자이다. 그들 중에 여자는 없다. 거리에서, 가게에서 여자들과 만나 웃고 이야기하고 차를 나누며, 지구 위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었는데, 어디에서 그들을 찾을 수 있을까?

파키스탄에 온 지 이제 일주일. 이 나라는 나를 헷갈리게 한다. 관광객에게는 이토록 친절하고 호의적인데, 아직도 한 해에 1000건의 '명예살인'이 일어나고, 여성의 식자율은 남자의 절반인 땅. 법적으로는 16세가 되어야 결혼할 수 있지만 여전히 13살의 나이에 결혼하는 소녀들이 있고,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결혼 대상으로 여자들을 선택해 사촌이나 친척 간에 물건처럼 주고받는 곳.

1999년에 발표된 인권감시위원회의 보고서에 의하면, 남성의 여성에 대한 정신적, 육체적 폭력 행사율이 90%에 이르는 곳. 강간으로 인해 임신한 여성조차 그들의 임신은 정숙하지 않음의 종교적 증거이므로, 남편이나 친척이 감옥에 보낼 수 있도록 법률이 든든하게 지원해주는 곳. 법률보다는 이슬람의 율법이 지배하고 통치하는 땅.

카이버 바자의 꼬치구이 노점. 폐샤와르
카이버 바자의 꼬치구이 노점. 폐샤와르김남희
정숙함이 의심되는 여성들을 남편이나 가족이 합당한 법률적 절차 없이 고소하거나 감옥에 보낼 수 있는 법안(Hudood Ordinance)이 1984년도에 통과되었다. 심지어 '무슬림 국가 최초의 여성 총리'라는 타이틀로 이슬람 국가의 여성 지위를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베나지르 부토 전 수상조차 'Hudood Ordinance' 법안에 대해 상급법원에 상소하지 않았다.

1999년, 이혼을 요구한 여성이 남편과 가족에 의해 살해당했을 때-가족의 명예를 더럽혔기 때문에 명예살인이라고 부른다- 파키스탄 여성들은 명예살인을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 것을 국회에 요구했다. 상원의장은 그 안건을 의제에 붙이기를 거부했다.

도대체 이 양면성을 어떻게 결합시키고,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튼 분명한 건, 이 모든 파키스탄 남자들의 호의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내가 의심의 눈초리를 떼지 않고 있다는 거다.

내가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내 안에 알게 모르게 들어 있는 피해의식과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연대감으로 인해, 여성에 대한 폭력과 살인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이 땅을 불순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덕에, 나는 어쩌면 동전의 뒷면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 기껏 들여다본 동전의 뒷면조차 앞면이라고 우기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해도 생래적으로, 어쩔 수 없이, 나는 이 시선을 고수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폐샤와르의 시장에는 독특한 모양의 빵을 구워파는 가게들이 많다.
폐샤와르의 시장에는 독특한 모양의 빵을 구워파는 가게들이 많다.김남희
흉흉한 이야깃거리들이 끊임없이 들려오는 이 땅에 대해, 이 땅의 남자들이 건네는 미소와 친절에 대해, 언제쯤 의심의 눈길을 거둘 수 있을까. 이 나라가 여행자들에게 아주 매력적인 땅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내가 부여한 점수는 일백 점 만점에 50점. 우선은 이 속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고 싶다. 점수 수정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사원에서 코란을 암송 중인 여학생들. 마하바 칸 모스크. 폐샤와르
사원에서 코란을 암송 중인 여학생들. 마하바 칸 모스크. 폐샤와르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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