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67회

등록 2005.04.22 07:54수정 2005.04.2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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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하게 석실에 스며드는 그림자가 있었다. 그의 움직임은 바로 곁에서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청송자는 운기 중에 있었다. 청송자의 전신은 희미한 안개가 낀 듯 기류가 흐르고 있었는데 눈 속을 파고드는 서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만큼 청송자의 공력이 깊고 정순하다는 증거였다.

만약 청송자가 운기 중이 아니었다면 그는 다음 기회를 노렸거나 목숨을 내놓는 모험을 할 것인지 망설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하늘이 자신을 돕고 있다는 증거였다. 또 한 사람. 갈유가 있었지만 그는 의원이었다. 무림인들과 교류가 있다고는 하나 그는 무림인이 아니었다. 그는 빠르게 모습을 나타냄과 동시에 청송자의 등을 향해 일장을 날렸다.


화르르---파--팡---!

시뻘건 빛이 폭사되며 손에서 쏘아나간 장력이 청송자의 등을 강타하는 순간 가죽 북 터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극양공(極陽功)이 십성에 이르러야 익힐 수 있다는 홍염장(紅焰掌)이었다.

"으--우억---!"

운기조식을 하던 청송자의 몸이 허공에 반장 가량 떠올랐다가 피화살을 뿜으며 떨어져 내렸다. 홍염장을 맞은 곳은 이미 도복이 새카맣게 타 있었고, 청송자는 입에서 피를 쏟아내며 혼절해 있었다. 갈유는 갑작스런 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까지 그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그는 천생 의원인 사람이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현상에 악착같이 원인을 밝혀내고 치료하고 싶은 것이 그의 욕심이다 보니 그저 탕약을 올려놓고 기다릴 때쯤이면 잠시 졸게 되는 것이다.

"누… 누구냐!"


금방 깨어나 시력이 흐릿한 그의 시야로 붉게 물든 손에서 화염이 쏘아 나오며 위맹한 장력이 짓쳐 오는 것을 보았다. 갈유는 다급히 옆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퍼--펑--!


그가 앉아있던 자리가 돌로 되어 있었음에도 움푹 파이고, 불꽃이 일며 시커멓게 그을려졌다. 아마 저 장력에 맞는다면 그의 전신은 구운 오리처럼 변해버릴 것이다. 석실 중앙에 늘어져 있던 청색과 홍색의 천들이 춤을 추듯 마구 휘날렸다. 갈유는 황급히 품속에 손을 넣어 비침을 꺼내 날렸다.

슈우우----쇄쇄---!

한웅큼의 비침이 허공을 덮으며 재차 공격해 오는 신형을 덮었다. 상대는 갑작스럽고도 민첩한 갈유의 대응에 잠시 놀라는 듯 했다. 그의 신형이 옆으로 돌며 소맷자락을 휘두르자 날아가던 비침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갈유가 노렸던 것은 바로 그 틈이었다. 그는 몸을 빠르게 굴리며 천이 늘어져 있는 반대편으로 향했다. 상대의 이목을 일단 가려보자는 의미였다. 그와 동시에 그는 홍색 천과 같이 늘어져 있던 줄을 잡아당기며 반대편으로 들어섰다.

'만약 동생이 갑작스레 악화된다던가, 급한 일이 생기면 이 줄을 잡아당기시면 되오.'

풍철영이 일러 준 말이었다. 일단 반대편으로 넘어와 한숨을 돌리는 순간 홍색과 청색 천에 불이 붙어 타오르며 매캐한 내음과 연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천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 갔다. 아마 상대가 손을 쓴 모양이었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퍼퍽---!

불길을 헤치며 달려드는 상대를 확인하려는 순간에 그는 정신이 아득할 정도의 고통이 옆구리에서 느껴졌다. 바로 옆에서 누군가가 비수로 자신의 옆구리에 박은 것이다. 그는 참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무작정 손에 잡힌 비침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헛…!"

그의 발악과도 같은 비침 세례에 상대의 입에서 헛바람이 터져 나왔다. 너무 가까이 있는 상황이라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아마 한두 개의 비침에 맞은 모양이었다. 그 순간 자꾸 아득해 가는 상황 속에서 갈유는 자신의 마지막 구명지기(救命之器)를 꺼내 허공에 던졌다.

퍼--퍼-- 펑 !

그것은 세 개의 호두알 정도 되는 둥그런 구슬이었는데 그의 손을 떠나자마자 터지더니 하얀 가루가 흩날렸다. 그것은 독한 군자산(君子散)이었다. 군자산은 사실 독은 아니었다. 다만 군자산의 양에 따라 무공을 펼칠 수 없거나, 움직일 수 없는가 하면 아예 잠에 빠져 드는 경우도 있었다. 의원으로서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자주 사용한 것이었는데 갈유가 자신의 구명지기로 강력한 군자산을 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뿌린 군자산은 한모금만 들이마셔도 곧 정신을 잃을 정도로 강한 것이었다.

그것은 순식간에 석실 전체로 퍼져 나갔다. 갈유는 그것을 던지는 순간 이미 호흡을 막고 있었지만 점점 전신이 마비되어 오는 느낌을 받았다. 옆구리에 찔린 비수에 아마 독이 묻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내심 자신의 몸을 마비시키는 독이 어떤 것인지 떠올리면서 급히 품속에서 환약을 꺼내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입으로 가져갔다.

다행스러운 것은 상대의 움직임이었다. 시야가 가리기도 했지만 그의 구명지기가 효력을 발휘했는지 더 이상 공격해 오지 않았다. 아니 공격을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풍철영은 은밀한 움직임을 쫒은 담천의를 기다리다가 갑자기 울리는 종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남들의 눈에는 벽을 장식해 놓은 것으로 보일 정도로 네모난 모양으로 벽 안에 진열되어 매달려 있는 주먹만한 두개의 금종(金鐘)이었는데 그것이 울리자 풍철영의 신형은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움직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의 얼굴에 근심과 긴장감이 동시에 떠오르며 뒷문을 부서져라 열어젖히며 난간 쪽을 향했다. 그의 신형은 아예 난간 위로 뛰는 것이 아닌 날고 있는 것과 같아서 한 마리 야조가 야행(夜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석실로 통하는 비밀스런 문은 열려 있었다. 이곳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또한 이것을 열 수 있는 사람 또한 드물었다. 더구나 그곳에는 항상 한명의 인물이 지키고 드나드는 자를 감시하기 위해 은밀하게 숨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풍철영은 다시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런… 누군가 침입했다.)

그는 문이 열려져 있고, 그곳을 감시하는 수하가 사라졌음을 알고 어찌된 일인지 금방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의 신형이 직각으로 틀어진 석로를 발이 닿지도 않게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은 눈을 감고도 다닐 수 있는 곳이었다. 왼쪽 모퉁이를 돌아 급히 나아가려는 순간 그의 앞으로 시뻘건 불길과 함께 위맹한 장력이 밀려들었다.

"홍염장(紅焰掌)!"

풍철영은 홍염장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 극성에 달하면 삼백근이나 나가는 돼지를 일격에 통째로 구워 익힐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나아가던 신형을 허공에서 한바퀴 선회하며 홍염장에 맞서 그의 장력을 날렸다. 푸른 기운이 도는 그의 장력은 홍염장과 마주치는 순간 거대한 폭음을 일으켰다.

퍼---펑---!

석실 전체가 울리는 듯 했다. 뜨거운 기운이 벽을 할퀴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풍철영의 신형이 다시 상대를 향해 쏘아가며 부드럽지만 기이한 장력을 연속적으로 내뻗었다. 그것은 마치 손에서 나아갈 때는 머리칼이 흩날릴 정도로 미미한 것이었지만 상대는 화들짝 놀라며 신형을 전후좌우로 신속하게 움직이며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그의 움직임은 불안정한 듯 보였다.

"십단금(十段錦)----!"

상대의 입에서 경악에 찬 음성이 토해졌다. 십단금은 무당파 비전의 장법(掌法)이었다. 발경(拔經)은 천하에서 가장 부드럽지만 상대에게 다가가서는 가장 파괴적인 타격을 주는 장력이 그것이었다. 무당의 면장(綿掌)을 완벽하게 익힌 후에야 비로소 입문할 수 있는 것이 이것이었다.

"알면 되었다."

풍철영의 목소리는 듣기에 섬뜩할 정도로 냉정하게 가라 앉아 있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걱정이 밀려들었다. 그의 신형이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이미 그의 마음은 누구든 죽이고자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태청신공(太淸神功)을 구성까지 끌어 올린 그의 전신에서는 한 겹 살얼음이 낀 듯 미세한 푸른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츠츳--!

그의 쌍수가 연달아 뻗어 나갔다. 상대 역시 피하기만 할 수는 없었던지 이를 악물고 홍염장을 펼쳤다. 하지만 그의 홍염장은 처음의 기세와는 달리 많이 약화되어 있었다. 장력과 장력이 마주치는 순간 이번에는 거의 소리가 나지 않았다. 다만 갑작스럽게 팔목이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가슴에 장력을 맞은 상대가 이장 밖으로 날아가며 피분수를 뿜었다.

"……?"

풍철영이 극도로 화가 났다고는 하나 홍염장 같은 절공을 익힌 자 치고는 너무 허무한 결과였다. 풍철영 자신도 이런 결과가 있을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뜻밖의 결과에 급히 상대에게로 다가들었다. 처음 보는 자였지만 이미 팔목이 부러져 나가고 어깨뼈 역시 탈골된 듯 보였다. 그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는데 이미 뭉개진 가슴으로 인하여 폐가 상해 죽지 않아도 숨을 쉬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갑작스럽게 죽어 자빠진 그 자를 옆구리에 끼고 동생이 있는 석실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석실 안에 들어서는 순간 매캐한 연기와 함께 난장판이 된 실내가 보였다. 그 순간 그는 옆구리에 낀 자를 내려놓고 호흡을 멈췄다. 냄새는 없었지만 석실에 들어서 호흡을 하는 순간 기운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군자산… 누군가 군자산을 뿌렸다!)

그제야 자신을 상대한 자가 왜 갑작스럽게 힘을 못 쓰고 죽었는지 알았다. 그 자 역시 미세한 양이지만 군자산을 마셨을 것이다. 그리하여 동작이 느려지고 완전한 공력을 내보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신형이 불안했던 것도 같은 이유였을 것이다.

그는 석실 안을 둘러보았다. 이미 석실 중간에 쳐있던 천들은 모두 타 버린 상태였고, 청송자와 갈유는 정신을 잃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기식(氣息)이 엄엄할 정도로 중상을 입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풍철한이었다. 덮고 있는 이불이 조금 그슬리기는 했어도 물에 적셔 놓은 탓인지 타들어가지 않았다. 상대가 미처 손쓰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군영의 시신이 놓인 관이 보였으나 그 안에 들어 있어야 할 가군영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황급히 관 앞으로 다가갔다. 관 안쪽에 누런 액체가 고여 있었다. 그리고 그는 곧 깨달았다.

(화골산(化骨酸)…!)

흉수는 화골산으로 가군영의 시신을 없애 버린 것이다. 아마 흉수는 풍철한까지도 이리 만들려 했을 것이다. 청송자나 갈유까지도 이렇게 없애 버렸을지 몰랐다. 그는 맹렬하게 타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그는 아주 느릿하게 움직였다. 석실을 통풍시키고 조용히 조국명을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일은 청송자와 갈유를 구해내는 일이었다.
(제42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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