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61

남한선성 - 말을 달려라!

등록 2005.04.22 17:02수정 2005.04.22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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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이서는 이시백이 가져온 작은 서책과 호롱불을 사이에 두고 말없이 마주 앉아 있었다.

“이괄의 난 때 참수된 김원량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는가?”


이서의 말에 이시백은 말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김원량은 한때 이서, 이시백과 더불어 친밀히 지냈던 사람이었다. 김원량은 인조반정 당시 이서와 이시백의 설득으로 뜻을 같이하겠다고 맹세했지만 막상 거사일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자신이 3등 공신으로 이름이 오르는 것조차 스스로 거부했다. 그러나 그의 재주를 아낀 이들이 조정에 끌어들였고 사헌부지평의 벼슬을 받아 입궐하게 되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김원량은 이괄 부자를 옹호하다가 옥에 갇혔고, 이괄이 도성에 난입하기 직전 김류와 김자점의 주장으로 참수된 후에 그의 이름은 공신의 반열에서 사라졌다.

“… 원량이 옥중에 있을 때 옷을 찢고 손가락에 피를 내어 상소를 올렸다네. 그 상소에는 ‘이미 역신을 비호하였다는 죄가 있으니 죽음을 감수하겠지만, 신의 심사를 아는 자는 곧 최명길, 장유, 이시백, 이서 네 사람이니 이들에게 물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네. 하지만 역적으로 몰릴 것을 저어해 네 사람 중 누구도 원량을 비호하지 않았네.”

“부끄러운 일입니다. 허나 이제 와서 어찌하겠습니까? 원량은 언행이 지나치게 경망스러웠습니다.”

이서는 얼굴 가득히 노기를 띠며 이시백을 책망했다.


“이제 와서 어찌하겠냐니? 그런 말이 어디 있는가? 그런 말을 하려면 무엇 하러 이것을 내게 가져와 보이는 것인가?”
“이것이야 말로 조정에 올바르게 예학(禮學)을 세울 수 있는 길입니다. 김류, 김자점이 이괄의 무리와 다를 것이 뭐가 있습니까?”
“말조심하게나….”

이서는 느릿한 어조로 말을 한 후 작은 서책을 들어 호롱불에 가져다 태워버렸다. 이시백은 이를 말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묵묵히 바라만 볼 뿐이었다.


“이미 난 늙고 병들어 오래 살지 못할 몸이네. 더 이상 죄를 지을 생각은 없네.”

이시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의 일은 깊이 묻어두겠습니다.”

이시백이 간 뒤 자리에 천천히 누운 이서는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졌다. 그날 밤, 차가운 바람과 함께 며칠째 내리는 비는 남한산성을 적셨고 성첩을 지키는 군사들의 괴로움은 더욱 심해졌다.

“이러다가 얼어 죽네! 하늘도 무심해라. 어찌하여 우리에게 괴로움을 내리시나.”

시루떡의 한탄이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고 비에 젖어 부들부들 떠는 병사들 중 몇몇은 그대로 잠이 든 채 생명을 위협받곤 했다.

“이보시게.”

한탄을 거듭하는 시루떡의 곁에 어느 사이 갓을 눌러쓴 이가 들어서 있었다. 깜짝 놀란 시루떡은 그를 탓했다.

“에구에구 깜짝이야. 간이 벌렁 떨어졌네!”
“자네 혹시 낮에 무엇인가를 줍지 않았나?”

뜬금없는 사내의 물음에 시루떡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그것은 대장님께 드렸소만.”

갓을 눌러쓴 사내는 실망을 담은 한숨을 깊게 쉬며 돌아서려다 다시 시루떡에게 물었다.

“거기 무엇이라 적혀 있던가?”
“까막눈이 뭘 알겠소?”

사내는 어둠 속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자네는 까막눈이라 산걸세.”

시루떡은 그 말에 멍하니 서 있다가 멀어져 가는 사내를 향해 소리쳤다.

“보소 보소! 그것이 무슨 말이오!”
“더럽고 멍청한 놈!”

사내는 욕을 하며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고, 졸지에 욕을 먹은 시루떡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라 사내의 뒤를 향해 ‘이런 미친놈 거기 서 보아라!’며 소리를 질러 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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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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