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범이 마을에 도착한 건 해가 뉘엿할 무렵이었다. 여름 이름값을 하느라 제법 길어진 해였지만 워낙 산간의 마을이라 금세 어둠이 깔렸다. 그래도 남자 어른의 잰 걸음으로도 한나절 가까이 걸리는 길을 권기범은 빨리 온 축에 속했다.
소찬이나마 정갈하게 차린 저녁상을 마주한 채 옛 이야기들로 자리가 흥청거렸다.
“기범이 이 사람아, 자네 그런 법이 어디 있는가? 간다면 간다, 온다면 온다 무슨 기별이라도 남겨놓고 다녀야지. 우리 사이에 7년 만의 해후라니? 심히 서운하이.”
유홍기가 말했다. 오경석과 유홍기가 서른 여섯, 권기범이 서른 셋. 이들 모두 역관들이 모여 사는 북촌에서 형, 아우로 지내던 터였으나 경신년 난 당시 권기범이 종적을 감춘 이후로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몇 해 전부턴 광산일에 매달리고 있노라는 풍문을 접하기는 했지만 권병무까지 가산을 정리해 한성을 뜨고 난 뒤로는 만날 기회가 없었다.
“내 기억 속엔 늘 총기 있고 무예 출중한 청년으로 남았더니 이제는 완연한 장년의 자태로고. 가히 대장부의 상일세.”
오경석도 반가움을 감추지 않았다. 빈말로 던진 인사말이 아니라 오경석의 눈은 권기범이 예전에 알던 평범한 손 아래 젊은이가 아님을 알아 보았다. 지난 날 이야기로 웃고 떠들며 이물 없이 대하고는 있으나 이미 자신이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지위의 사람이 아닌 티가 역력했다.
‘범은 범을 낳는다더니......’
오경석은 유홍기와 담소를 나누고 있는 권기범을 지긋한 눈매로 살폈다. 수려한 풍모야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라 치더라도 그윽한 눈매가 상대를 포용하고 세상을 다 담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예전의 팔팔함이야 사그라졌을 지라도 팽팽한 근골은 더욱 원숙해진 냄새를 풍겼고, 수다스럽지 않은 입술은 다물면 다무는대로 열면 여는대로 힘 있는 변설을 얼마고 쏟아 놓을 듯 했다.
이제 서른을 넘어선 사람치고 많은 일들을 겪은 티는 역력하였으나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이 시기 조선을 사는 사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권병무가 서른 다섯이 넘어 얻은 첫 자식이었다. 게다가 산모가 산독을 이기지 못하고 숨졌기에 아비인 권병무에게는 권기범이 에미를 잡은 원수이면서도 천지간에 유일한 살붙이였다.
글공부와 무예수련으로만 점철된 권기범의 어린 시절을 보면서 그 어린 나이에도 오경석은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복수로 여겼다. 오경석 자신 역시 역과 준비로 피나는 세월을 보낸 사람이었으나 도대체 중인 신분으로 써 먹지 못할, 혹은 역관의 지위가 보장된 계층에게는 무용한 학문과 무예에 끝없이 매달리게 하는 권병무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만에 대하는 권기범의 원숙한 자태를 보면서 권병무의 숨은 포부와 자식에 대한 기대를 엿볼 수 있었다.
“자, 형님들 한 잔 받으십시오. 어렸을 땐 형님들이 어찌나 부럽던지요. 전 아버님의 친자가 형님들이고 전 서자쯤이나 되는 줄 알았다니까요. 어떤 땐 원망의 마음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저 경석이처럼만 해라, 홍기 반만 닮아라. 아주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으니까요.”
권기범이 농담을 하며 잔을 올렸다.
“어르신께서 꽤 어려운 주문을 하셨구먼 그래.”
유홍기도 농담으로 응수하며 잔을 받았다.
“그래도 이리 훌륭하게 장성하였으니 어르신께서 더 바랄 게 없겠어. 안 그렇습니까요 어르신?”
오경석의 말에 권병무는 그저 빙긋 웃을 뿐 별 말이 없었다.
“왜 더 바랄 게 없으시겠나. 장부 나이 서른이 넘었으면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아직도 미장가인 듯 허이.”
권기범의 상투가 외짜로 틀어올린 것임을 눈치 챈 듯 유홍기가 말했다. 이십 대 후반 무렵까지 미혼이었고 그 뒤로도 안정적인 생활을 한 흔적이 보이지 않으니 미장가인 건 뻔한 일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더구나 며느리가 있었다면 광산에 올라가 살 리는 없고 분명 이 집에 살 터인데 한 마디 언급이 없었으니 서른이 넘은 권기범의 상투가 가짜임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내 보기엔 어르신 심중에 장가보다 더 급한 게 있는 듯 허이.”
오경석이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님?”
권기범이 자신의 이야기로 농이 오가는 것이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혹, 어르신께선 기범이가 이 나라의 주인이 되길 고대하시는 것은 아니신지요?”
오경석의 말에 좌중은 일순 표정이 굳었다. 무슨 농담이라도 나오려나 하고 기대하던 판에 냉기가 끼쳤다.
“역매 이 사람아 설마하니......”
유홍기가 얼른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권병무도 눈에 약간의 힘이 들어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나쁜 뜻으로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다만 어릴 적부터 기범이를 가르친 방식이 왕재(王才)로 키울 목적이나 난세의 영웅으로 기를 목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오늘 장성한 기범이를 보고 있노라니 문득 그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박규수 어른과의 만남도 기범이가 한다니, 일전에 말씀하신 ‘대동계 젊은이들’이란 아마 기범일 염두에 둔 말씀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 보니 기범이가 그들 사이에 좌장 역을 하여도 손색이 없을 자태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굳이 아니라고는 하지 않겠네.”
“아버님!”
권병무의 말에 권기범이 짧고 경직된 일갈을 뱉었다.
“하긴......왕후장상이 씨가 따로 있기야 하겠습니까.”
유홍기도 대충 분위기에 맞춰 한 마디를 거들었다.
“아버님, 그리 할 수는 없다고 분명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인재의 등용에 존비귀천이 따로 없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또한 백성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부하게 하는 일에 이 한 몸 헌신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를 권력이나 탐하는 모리배로 만들지는 마십시오. 제가 일시적으로 무리를 영도하고 있는 자리에 있다하여 새 나라에서도 꼭 같이 적용되리란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아니 가능하다해도 그리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권기범이 정색을 하고 단호한 어조로 대꾸했다. 아버지 앞이기도 하려니와 손님까지 옆에 있다보니 험악한 낯빛을 내지는 않았으나 의사를 분명히 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였다.
“순진한 생각을 버려라. 네 한 몸을 위한 일이 아니다. 새 술은 새 독에 담아야 하는 법. 새 나라가 세워지면 새 지도자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기존의 누가 누천년 묵은 사고의 틀을 깨고 이 나라를 이끌 수 있겠느냐. 대원군이냐?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냐? 아니면 윤서나 민균이가 하겠느냐, 그렇다고 나나 모 진사가 하겠느냐. 어리석은 고집 부리지 말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권병무도 물러서지 않고 완고한 태도를 보였다. 손님을 옆에 두고 부자지간에 나라를 가져라 마라 하는 모습이 어이없는 행동임을 잘 알 터인데도 둘 사이에 물러섬이 없었다. 분명 이 문제로 두 사람 간에 오랜 마찰을 빚어온 것이 틀림 없었다. 물론 이런 지각 없는 대화가 불거진 것은 오경석이 불쑥 질러 놓은 까닭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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