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역사소설> 흐르는 강 58

대원군 집정기 무장개화세력의 봉기, 그리고 다시 쓰는 조선의 역사!

등록 2005.04.27 03:06수정 2005.04.27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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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니, 이건?"

정준이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오경석이었다. 긴가민가 하는 표정으로 눈이 휘둥그레 졌다.
행랑 안에 책상이 놓여 있고 물레 잣는 도구 비슷한 것이 그 위에 꽉 차게 얹혀 있었다. 몇 가닥 선이 비죽이 연결된 것을 제외하면 방안은 책상과 의자, 그리고 그 기기뿐이었다.
그래도 여러 차례 중국 사행길에 올랐던 오경석이 유홍기보다 먼저 그 기기의 용도를 알아 보았다.


"이, 이건...... 전신기(電信機)가 아니옵니까?"

"그렇네. 전신기일세."

권병무가 대답했다.

"하오면 저것이, 그......멀리 있는 이와 면대하지 않고도 의사를 주고 받을 수 있다는 전신기란 말입니까?"

권병무로부터 '전신기'란 말을 들은 유홍기가 그제서야 아는 체를 했다. 전신기를 본적이 없음은 물론이요, 원리와 용도에 대해서만 오경석으로부터 귀동냥한 정도였다. 때문에 자기 앞에 그 신묘한 기기가 놓여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매우 놀라워 했다.


"어렵사리 서양 상인으로부터 몇 좌를 구했네. 지금은 광산과 마을을 잇는 연락 장치 정도로만 운용하고 있네만 머지 않은 세월 안에 조선 전역에 뻗는 날이 오겠지."

"어....어떻게 이런 생각을? 양무운동이 한창인 청국에서도 아직 시도하지 못한 일이거늘 우리 조선에서....."


오경석은 묘한 감회에 마저 말을 맺지 못했다. 조선에게 청나라는 이웃나라가 아니라 상국이었다. 조선의 왕은 청국 천자의 신하였으며 중국은 항상 문화의 시혜국이었고 조선은 수혜국이었다. 역관의 임무를 수행하며 직접 목도한 조·청 관계는 그야말로 부인할 수 없는 속국의 모습 그대로였다. 심지어 중국이 서양의 여러 나라에 침탈당하고 뜯기는 지금의 시기에서도 관계는 별반 변화될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7년 전(1860년) 북경을 영불 연합군에게 함락당하는 수모를 겪은 뒤에 비로소 서양의 근대 무기와 기술의 우월성만을 인정하여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정신으로 서양의 기술과 무기를 받아들이자는 양무운동이 일어났었다.
6년 전(1861) 베이징[北京]에 총리아문을 설치하면서 시작되었고 재작년(1865) 상하이[上海]에 강남기기총국(江南機器總局)이, 난징[南京]에 금릉기기국(金陵機器國)이 설립되어 총탄, 화약, 총포 등이 제조되면서 양무운동은 절정을 맞고 있었다.
그런 청나라도 아직 전신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인데 조선의 외진 산골 마을에서 전신이 운용 되고 있다.

오경석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개 역관의 식견으로도 미래 사회는 증기기관과 전신으로 대표되는 문명의 이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임을 알 수 있었기에 몸소 조선 땅에서 전신기를 접하는 심회라는 게 누구보다도 남달랐다.

"이것이 정녕 사용 가능한 도구입니까?"

마음을 가라 앉힌 오경석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권병무에게 물었다.

"물론이네. 실은 자네들이 올 때 내가 미리 마중을 나갈 수 있었던 것도 마을 초입에 마련된 경수소에서 전신으로 전갈을 보내 왔기 때문이지. 물론 기범이가 산에서 마을로 내려 오고 있다는 소식도 이 때문에 알 수 있었고. 만일 제물포에서 한성까지 전신이 연결된다고 생각해보게, 한성과 평양 사이, 부산 동래와 한성 사이 이 전신이 깔린다고 생각해보게 그간 도보로, 파발로 전하던 온갖 소식이 일순에 퍼지게 되는 것일세. 이것이야말로 나라가 강성해지는 요체가 아니겠는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소인도 철도의 건설과 더불어 전신의 보급이 절실한 과제라 여기고 있었던 차이온데 여기서 전신을 접하니 놀란 가슴을 어쩌지 못하겠습니다."

어차피 철도와 전신은 서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관계인 것을 오경석도 알고 있었다.

30여년 전(1834) 영국인 쿡(Cook, W.F)의 5침식(針式) 지시전신기의 실용화 시험에 흥미를 느낀 모스(Morse, S. F. B)라는 이가 몇 해 뒤 (1839년 9월) 뉴욕대학에서 500 보의 전선을 깔아 전신의 실험에 성공한 이래 특허권을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에 팔고자 하였으나 냉대를 받아 좌절하였다는 점, 그러나 미국정부와 교섭하여 3만 달러의 건설자금을 받아 워싱턴과 볼티모어 사이에 1845년 5월 24일 전선의 가설을 완공하고 최초의 전건(電鍵)을 두드려 "What hath God wrought!"라는 문장을 보내는데 성공하였고 이를 모스전신이라 불렀다는 점 등은 알 바가 아니었으나 이 모스전신이 철도의 안전운행수단으로 사용되면서 각광받기 시작하여 15년 전(1852)무렵엔 유럽전체의 전신망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이 전신이라는 게 말을 단점(.)과 장점(-) 2종류의 기호로 조합하여 보내는 방식이라 들었사온데 그 방식이라는데 서양말을 조합하는 법이 아니겠사옵니까? 그리하다면 우리말로는 어찌 표현할 수가 있는지요?"

오경석의 질문이었다. 유홍기는 권병무와 오경석의 대화를 경청할 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중국을 드나들면서 서구 문물을 눈으로 직접 접해왔던 오경석의 식견은 탁월했다.

"하하하. 아무래도 자기 밥벌이 수단은 숨기지 못하는 법이어서 역관인 자네가 그 점을 아니 물을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네. 바로 이 젊은이가 전신의 도입에 큰 역할을 해온 일꾼일세."

권병무가 이제껏 말없이 안내만 하던 정준을 가리켰다. 젊은이는 '박정준'이라며 자신을 소개하고 가만히 목례를 올렸다. 허름하게 차렸으나 볼수록 단아한 인상이 끌리는 청년이었다.

"전신기 사용과 수리, 가설에 관한 기예를 몸소 익힌 사람이기도 하거니와 서양말의 부호를 국문전신부호로 만든 사람이기도 하지. 우리는 그걸 국문자모호마타법(國文子母號碼打法)이라고 명명했네만......만약 후일에 조선전보총국이 만들어진다면 초대 국장이 될 사람이지. 하하하하"

연이어 설명을 하던 권병무는 말을 하다말고 너털 웃음을 웃었다.

오경석은 내일 모레면 칠십을 바라볼 노인이 맑게 웃는 모습이 참 싱그럽다고 생각했다. 그 웃음의 의미가 진서가 아닌 언문을 '국문'으로 삼은 것이 우습다는 것인지, 마을에 전신기 몇 대 갖다놓고 벌써부터 '조선전보총국' 운운하는 말이 우습다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권병무의 웃음에 담긴 어떤 확신은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가진 망상 같은 신념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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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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