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어르신, 참으로 외람된 말씀이오나 이는 예가 아닌 듯하옵니다. 물론 말을 꺼낸 제 잘못이 큽니다만......"
오경석이 분위기를 가라 앉혔다.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을 아버지에 의해 혹독히 다져지기만 한 기범이가 이렇듯 자기 의견을 내세우며 부친과 대립하는 모습은 생경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냥 지켜보기에는 자신들의 입지가 애매했다.
"어차피 형님들을 모신 이유가 계의 존재를 드러내고 도움을 받고자 함이었으니 말씀 드립니다만, 저희가 준비하는 건 왕을 바꾸자는 것이 아닙니다."
"......?"
오경석과 유홍기는 눈을 지그시 모으며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험......"
한 켠에서 그만 하라는 듯 권병무가 된기침을 했다.
"왕이 없는 나라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권기범은 말을 마저 뱉었다.
"왕이 없다니? 그러면 서양의 법제를 그대로 본뜨자는 말인가?"
유홍기가 말했다.
"이를테면 그렇지요. 영길리처럼 입헌군주제도 좋고, 미리견처럼 대통령제도 좋습니다. 세습이 아닌 선출로 나라를 이끌어 갈 이를 가린다는 취지는 같지요. 나라의 주인될 권리를 백성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게 말처럼 쉽겠는가. 왕만 바꾼다면 이해관계가 얽힌 추종 세력이 뒷받침해 주겠지만 왕정 자체를 부인한다면 그에 기생하는 기득권층 전체를 부인하겠다는 의미가 되는데...... 자네들의 힘만 가지고 그게 되겠는가? 향촌에 뿌리 내린 토호들이나 모든 관직을 독점하고 있는 권문세족들의 힘을 너무 쉽게 본 듯한 발상이 아닐런지?"
오경석도 조심스럽게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그 말이 맞네. 왕정마저 부정한다면 청나라의 간섭을 막아내지 못할 터인데 그게 가능이나 하겠는가? 거사를 하더라도 일단 새 임금을 옹립하고 신사상을 가진 인재를 요직으로 중용해서 서서히 개혁을 추진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 동도서기(東道西技)의 마음으로 개항을 추진해 나가는 것도 좋을 듯 하고."
유홍기도 오경석의 말에 동조했다.
권병무는 가타부타 말이 없는 가운데 권기범이 입을 열었다.
"염려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는 압니다. 조선의 본체를 중시하고 틀 안에서 점진적 개혁을 추진한다는 복안은 그럴싸한 이야깁니다. 허나 고름에 칼을 댈 때 단번에 짜내지 않으면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되듯 변화를 줄 때는 과감히 시행하는 것이 좋습니다.
청나라의 문제는 잠시 놓아두어도 좋을 것입니다. 당분간 바깥 문제에까지 눈 돌릴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이 때를 노려야 합니다. 그 후로는 서양 열강과의 조약으로 방어책을 두어야 하고요.
그리고 동양의 도를 중심에 두고 서양의 기술을 익히는 말씀을 하셨는데, 아마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겠지요? 중국의 것을 그대로 두고 단지 서양의 무기와 기술만을 수용하여 변화를 꾀하겠다는 발상이 과연 성공할까요? 지금 모습만 보고 있노라면 양무운동이 성공할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허나 두고 보십시오.
머지 않아 중국은 한계에 봉착하고 말 것입니다. 아편전쟁에 패하고 근자에는 북경까지 서양 연합군에게 함락당하고서도, 패배의 원인이 마치 열악한 무기 때문인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 전쟁이 화이사상에 젖은 의례 외교 중심의 조공체제와 만국평등의 원칙에 입각한 조약체제의 충돌이며, 무역을 중화의 선진문물에 굶주린 오랑캐에게 베푸는 천자의 은전으로 생각한 청조와 만국 간의 공동 이익과 부국강병 도모를 위한 필수 수단이라고 여기는 영길리국의 대결임을 인식하지 못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 관료의 관존민비 사상, 상업천시 풍습과 신흥 자본주의 층의 자유주의 사상 간에 벌어진 한판 접전이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선은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낡은 것은 과감히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해야 하지요."
유홍기는 오경석, 심지어 박규수의 안목을 넘어서는 권기범의 안목에 놀라고 있었다. 청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아편전쟁, 애로우전쟁 등으로 배외 쇄국주의가 굴복되고 안으로는 태평천국운동으로 인해 봉건적 지배체제가 위기에 빠졌다.
이러한 사태의 해결을 위해 증국번 이홍장 좌종당 등 한인관료와 공친왕(恭親王) 등 궁정대관료(宮廷大官僚)가 근대무기의 수입·제조를 개시하고 군사공업을 일으켰던 것이다.
봉건체제의 유지 보강을 서유럽으로부터의 근대기술 도입에서 이루려 한 자강운동이었으므로 태생적 한계를 갖게 될 것임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권기범의 날카로운 지적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조선 팔도에 이만큼 조선의 나아갈 길에 대해 인식하고 있는 자가 있는가.
젊은 사람의 무리한 이상으로 여겨지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조선의 앞길에 한 번은 치러야 할 홍역이었다.
유홍기의 놀람은 약간의 후회를 동반하고 있었다. 결국 말려들었다는 생각, 권병무와 이야기할 때도 그런 느낌이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앞날을 위해 제자들을 키우며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라는 권고쯤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권기범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이 마치 그들이 조선의 변화를 주도할 진정한 세력인양 대접해 주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들과 조선의 앞날을 같이 고민하는 동반자의 입장으로 변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