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싱한 생메르치 젓갈 담으이소"

<음식사냥 맛사냥 22>구수하면서도 달착지근한 밥도둑 '멸치육젓'

등록 2005.05.19 15:08수정 2005.05.20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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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육젓 드이소~ 구수하고 달착지근한 멸치육젓!
멸치육젓 드이소~ 구수하고 달착지근한 멸치육젓!이종찬
"메르치(멸치) 젓 담으이소~ 메르치! 싱싱한 생메르치 젓갈 담으이소~ 메르치! 메르치 젓 담으이소~ 메르치! 달달하고 구수한 생메르치 젓 담으이소~ 메르치!"

한반도 남녘, 경상도 곳곳에서는 해마다 오뉴월 이른 새벽이면 생멸치 젓갈을 담으라는 아주머니들의 늘어지는 목소리가 동편제처럼 울려퍼진다. 이는 지난 3~4월이 새벽안개처럼 푸르스럼한 재첩국을 먹는 철이었다면, 오뉴월은 기장 대변항에서 갓 건져 올린 싱싱한 생멸치 젓갈을 담는 철이라는 그 말이다.

하지만 요즈음 사람들은 젊은이나 늙은이나 할 것 없이 생멸치를 사라는 아주머니의 구성진 목소리에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 가까운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면 언제든지 싱싱한 멸치육젓이나 멸치액젓을 구할 수 있는데, 굳이 생멸치를 사서 번거롭게 젓갈을 담글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 지난 70~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오뉴월이 다가오면 이 지역 마을 아낙네들은 생멸치를 파는 아주머니가 이제나 저제나 찾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이 때를 놓치면 멸치젓갈을 제대로 담글 수 없을 뿐만 아니라 1년 내내 구수하면서도 감칠맛 깊은 멸치젓갈을 맛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잘 익은 멸치육젓 한 통에 5천원
잘 익은 멸치육젓 한 통에 5천원이종찬

기장 대변항에서 오뉴월에 건져올린 왕멸치가 특히 맛이 좋다.
기장 대변항에서 오뉴월에 건져올린 왕멸치가 특히 맛이 좋다.이종찬
특히 오뉴월 장독에 담근 생멸치는 보름에서 한 달쯤 지나면 생멸치의 살이 물컹물컹해지면서 구수한 향과 함께 독특한 단맛이 나기 시작했다. 또한 그때쯤이면 밥상 위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것이 생멸치 육젓이었다. 살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고 있는 생멸치 육젓 살점 한 점을 밥 위에 올려 먹으면 그 독특한 감칠맛 때문에 밥 한 그릇은 금세 뚝딱 비운다.

어디 그뿐이랴. 오뉴월에 담근 멸치젓갈은 김장철이 올 때까지 가난한 시골의 허술한 밥상을 지켜주는 든든한 밑반찬이었다. 마을 아낙네들은 여러가지 나물을 무칠 때에도 반드시 멸치젓갈을 기본 양념으로 썼고, 밭에서 금방 뜯어낸 싱싱한 채소로 쌈을 싸먹을 때에도 쌈장으로 멸치젓갈과 된장 두 가지를 내놓았다.

이처럼 우리가 즐겨먹는 멸치젓갈은 영양가뿐만 아니라 약효도 뛰어나다고 한다. 지난 해 5월 부산 동의대 생명응용과학과 정영기(57) 교수는 "한국의 전통발효식품인 멸치젓에서 성인병의 원인 중 하나인 피떡을 분해시키는 물질을 발견해 이를 '멸치키나아제(Myulchikinase)'로 이름 붙였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정 교수는 "피떡(혈전)은 혈액 내의 응고된 물질로 혈액의 흐름을 방해하거나 미세혈관을 막아 심근경색, 뇌중풍(뇌졸중), 폐경색, 고혈압 등 성인병을 유발하는 원인"이라며, 이러한 환자에게 '멸치키나아제'를 투여한 결과 피떡이 녹으면서 혈액의 흐름이 아주 좋아졌다고 밝혔다. 게다가 여러 암세포를 대상으로 멸치키나아제를 항암제와 함께 투여했을 때 항암제만 사용했을 때보다 약효가 훨씬 높게 나왔다고 한다.

불그스름한 멸치살이 그대로 붙어있는 맛깔스런 멸치육젓
불그스름한 멸치살이 그대로 붙어있는 맛깔스런 멸치육젓이종찬

멸치육젓에 마늘, 매운 고추, 잔파, 고춧가루를 듬뿍 넣으면 금세 밥도둑으로 변한다
멸치육젓에 마늘, 매운 고추, 잔파, 고춧가루를 듬뿍 넣으면 금세 밥도둑으로 변한다이종찬
멸치젓갈은 특유의 구수한 향과 함께 텁텁한 듯하면서도 부드럽게 혀끝을 감싸도는 감칠맛이 그만이다. 멸치의 살이 붙어있는 멸치육젓은 송송 썬 매운 고추와 빻은 마늘, 송송 썬 잔파,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잘 버무려 살점을 올려먹는 맛이 끝내준다. 멸치의 살이 다 녹아내린 멸치액젓은 경상도 지역에서는 김장을 할 때 빠져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양념이기도 하다.


"자기 멸치젓갈 좋아하지?"
"그걸 말이라고 해? 요즈음 한창 맛이 좋을 땐데."
"오늘 멸치육젓 한 통 들고 갈 테니까 기대해."
"멸치육젓은 기장 대변항에 가서 사와야 제 맛이지."
"체! 누굴 바보로 알아. 그렇잖아도 며칠 전에 기장 대변항에 있는 특산물 마트에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거네요."


그렇다. 경상도에서는 생멸치, 하면 기장 대변항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특히 오뉴월에 건져올리는 기장 대변항의 왕멸치(10~15cm)는 가을에 건져올리는 왕멸치보다 살이 많고 연하기 때문에 그 맛이 훨씬 고소하고 달착지근하다. 특히 입맛이 없을 때 멸치육젓을 꺼내 연하게 녹아내리는 멸치 살을 밥 위에 올려 먹으면 '밥 좀 더 줘' 소리가 절로 나오게 된다.

집에서 멸치젓갈을 담는 방법도 그리 어렵지 않다. 싱싱한 생멸치를 사서 소금물에 깨끗이 씻은 뒤 소쿠리에 건져 물기를 뺀다. 그 다음 생멸치를 적당한 부피로 항아리에 꼭꼭 눌러서 담고 멸치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왕소금을 뿌리는 것을 반복한다. 마지막으로 항아리 맨 위에 왕소금을 조금 많다 싶을 정도로 뿌린 뒤 커다란 돌멩이를 얹어 꼭꼭 막은 뒤 시원한 곳에 두면 그만이다.


양념이 아주 잘 된 멸치육젓
양념이 아주 잘 된 멸치육젓이종찬

멸치젓갈은 심근경색, 뇌중풍(뇌졸중), 폐경색, 고혈압 등 성인병에 아주 좋다고 한다
멸치젓갈은 심근경색, 뇌중풍(뇌졸중), 폐경색, 고혈압 등 성인병에 아주 좋다고 한다이종찬
그렇게 한 달쯤 지나 뚜껑을 열어보면 멸치 특유의 비릿하면서도 구수한 내음이 번지면서 멸치의 살이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시작한다. 이 때가 멸치살이 그대로 붙어있는 멸치육젓을 꺼내 먹기에 가장 좋은 때다. 하지만 생멸치를 김장용 액젓으로 담갔을 때는 될 수 있는 한 뚜껑을 열어보지 않는 것이 좋다.

나물무침용이나 김장용 멸치젓갈은 달여서 쓰는 것이 좋다. 잘 익은 멸치젓갈에 물을 2:1의 비율로 붓고 센 불에서 팔팔 끓이면 멸치살은 모두 빠지고 뼈만 남게 된다. 이때 멸치액젓을 체에 밭쳐 거른 다음 찌꺼기는 버리고 다시 한번 팔팔 끓인다. 그리고 멸치액젓과 소금을 10:3의 비율로 섞어 보관하면 끝.

한가지 주의할 것은 살이 그대로 붙어 있는 멸치육젓이나 살이 모두 녹아내린 멸치액젓에 짠맛을 줄이기 위해 물을 붓거나 맛을 더 좋게 한다며 화학조미료를 섞으면 절대 안 된다는 점이다. 이는 멸치젓갈에 다른 불순물을 섞으면 금방 변질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참고로 멸치젓갈은 100% 천연발효식품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서울사람들은 김장김치든 일반 김치든 김치를 담글 때 멸치젓갈을 쓰지 않고 새우젓갈을 쓴다더구먼."
"그러니까 서울에서는 멸치젓갈을 구하기가 어렵지."
"그때도 이맘때쯤이었지, 아마. 멸치젓갈이 하도 먹고 싶어서 서울 시내에 있는 재래시장을 샅샅이 훑고도 결국 못 사고 말았잖아."
"하여튼 서울 김치는 시원하고 달착지근한 맛은 있지만 깊은 맛이 없고, 경상도 김치는 텁텁한 것 같지만 구수하고 깊은 감칠맛이 그만이야."


하얀 쌀밥 위에 멸치 살점을 올려놓고 먹는 그맛은 정말 끝내준다.
하얀 쌀밥 위에 멸치 살점을 올려놓고 먹는 그맛은 정말 끝내준다.이종찬
아내가 때 맞춰 사 온 기장 대변항 멸치육젓. 멸치육젓의 두껑을 열자 이내 비릿하면서도 구수한 내음이 온 집안에 흐른다. 두 딸 푸름이와 빛나는 '이게 무슨 냄새야?'하며 인상을 잔뜩 쓰고 코를 틀어막는다. 하지만 그 멸치육젓에 마늘과 매운 고추, 잔파, 고춧가루를 집어넣어 버무리자 금세 빛나가 쪼르르 달려와 '이게 뭐냐'고 묻는다.

내가 '밥도둑'이라며 젓가락으로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멸치살을 한 점 떼내 입에 넣고 기분 좋게 우물거리자 둘째 딸 빛나가 '나도' 한다. 그냥 먹으면 빛나가 짜다고 할 것 같아 하얀 쌀밥 위에 잘 익은 멸치살을 얹어 입에 넣어주자 몇 번 씹지도 않고 그냥 꿀꺽 삼켜버린다.

"아빠! 정말 맛있어. 또 줘!"
"상추쌈에 싸먹으면 더 맛있다."
"아싸! 내가 좋아하는 파마상추다. 아빠! 상추에 밥은 내가 쌀 거니까 멸치살만 조금 떼서 올려줘."
"알았어."
"음~ 이렇게 맛있는 걸 왜 인제서야 먹어? 이거 아직 많이 남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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