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77

남한산성 - 닭죽 한 그릇

등록 2005.05.20 17:02수정 2005.05.20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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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놈!”

난데없는 호령소리에 김돈령은 주춤거리며 칼을 뒤로 물렸다. 그 목소리는 틀림없는 수어사 이시백이었다.


“이게 무슨 짓들이란 말인가!”

김돈령은 속으로 적잖이 당황했지만 이런 경우를 대비해 생각해 둔 대답이 있었기에 입을 여는데 있어 막힘이 없었다.

“아뢰옵니다. 초관 장판수가 윗사람의 지시를 어기고 마음대로 행동하기에 처벌하여 군기를 바로 세우려 함이옵니다.”
“닥치거라! 군기를 바로 세움은 네놈 따위에게 있지 않다!”

김돈령은 이시백의 호통소리에 움찔하며 물러났다.

“장초관은 날 따라오라.”


이시백은 노한 표정으로 장판수를 불러내었다. 장판수는 굳은 표정으로 이시백을 따라갔고 작은 방에서 둘은 조용히 얘기를 나누었다.

“그래, 뭘 해도 자네는 조용하질 않군.”
“죄송합네다.”
“방금 수어청에서 자네를 긴밀히 불러낸다기에 자초지종을 알아보고 거부하였네. 무슨 일인지 짐작이나 하고 있나?”


장판수는 조용히 고개를 숙일 따름이었다.

“자네를 성 밖으로 보내 평안도의 근왕병을 이리로 진군하게 하라는 전갈을 전하라는 명이었네.”

장판수는 문득 잊고 지냈던 친구 윤계남과 평안감사 홍명구가 떠올랐다.

“그건 자네를 밖으로 내보내어 죽게 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네! 여태까지는 성안의 일에 쫓기어 자네가 어디로 불러 가도 무심했네만 이제 항복을 하자는 논의가 계속되는 판국에 아까운 갑사하나를 왜 호랑이 아가리에 던져 버리겠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네! 자네를 굳이 보내려면 어명이 있기 전 까지는 아니 된다고 하였네만.”

이시백은 말을 멈추고 뒤늦게야 머리에 쓴 전립을 벗어낸 후 자세를 가다듬었다.

“결국 누군가의 농간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어명이 떨어질 것이고 자네는 헛되이 죽어갈 것이네. 그러니 내 할 말은 아니네만...”

이시백은 허리에 찬 짧은 환도를 쑥 빼내더니 장판수 앞에 던져놓았다.

“이번 전투가 격했으니 자네는 오랑캐들에게 다리를 찔려 운신 할 수가 없는 것이네.”

장판수는 놀란 눈으로 이시백과 환도를 번갈아 보더니 대뜸 환도를 도로 이시백 쪽으로 밀어 놓았다.

“아닙네다. 내래 성 밖으로 나가 평안도 근왕병을 이리로 불러 오갔습네다.”

“지금은 성 밖으로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네! 게다가 평안도 근왕병을 불러온다 해도 이제 와서 뭘 하겠나?”

“나으리 말씀은 고맙습네다만 내래 이미 여기서 죽을 각오가 된 몸입네다. 그리고 익히 알고 지내던 평안도 감사 나으리와 거기 있는 친구놈인 윤계남이가 아직도 미적거리고 있다는 점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습네다. 그것도 따져 물을 겸 전 반드시 가겠습네다. 비굴하게 피하지 않겠습네다.”

이시백은 장판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고 장판수도 굳은 결의가 담긴 눈을 이시백에게 내보였다.

“오늘 적이 패하긴 했으나 내일 다시 다른 곳을 노릴겁네다. 그 틈을 타서 성 밖으로 나가는 수가 있습네다.”
“......자네 뜻이 그렇다면 굳이 말리진 않겠네.”

마지못한 이시백의 말에 장판수는 당차게 일어서 나갔고, 이시백은 바닥에 놓인 환도를 거울삼아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잠시 동안 굳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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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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