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역사소설> 흐르는 강 76

대원군 집정기 무장개화세력의 봉기, 그리고 다시 쓰는 조선의 역사!

등록 2005.05.24 22:12수정 2005.05.25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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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아티엔은 박도(朴刀)의 손잡이를 꽉 움켜 쥐었다. 태평천국 시절부터 쥐고 있던 칼이었다. 청국군의 제식무기로 쓰이기도 하지만 유난히 태평천국군이 많이 써서 '태평도(太平刀)'라는 별칭이 붙은 칼. 날 길이 한자 반에, 끝으로 갈수록 날이 넓어지는 이 박도를 쥐고 있노라니 불끈 힘이 솟았다.

"그래 어디 한 번 해 보는 거야. 와라 이놈들아! 감히 조선놈들 따위가 대국인을…."


"쾅-, 쾅."

채 말이 끝나기 전에 폭음이 들리고 배가 뒤틀렸다. 또 어딘가를 제대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꽝, 꽝."

이쪽도 신속히 포를 쏘았다. 손잡이가 있는 자포(子砲)를 여러 개 장전해 두었다가 모포(母砲)에 끼워 발사하는 방식이므로 장전속도는 매우 빨랐다. 삼십 보 내외의 거리에서 쏘아대는 지라 양측 모두 명중탄이 났다. 지름 한 치짜리 철환이 주는 효과와는 무관하게 무언가 저항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는지 선원들이 다시 포구문에 총을 대고 총을 쏘았다.

"그래 그래, 저놈들의 포를 겨냥하고 쏘아라!"


부두목 후안이 격려했다.

포수들도 바쁘게 움직였다. 다시 자포를 채운 포차를 포구문으로 밀었다. 포수 하나가 횃불을 들어 불랑기 점화구로 가져갔다.

"탕."


막 점화를 하려던 포수가 저쪽 뱃전의 구멍에서 번쩍하는 불빛을 느꼈다. 멈칫하던 포수가횃불을 떨구며 가슴을 움켜쥔 채 뒤로 넘어갔다.

"젠장 어떤 녀석이 이 곳만 노리고 있었나봐!"
"뭐야!"

선창에 잠시 술렁임이 일었다.

"어서 쏘란 말야 이놈들아!"

후안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꽝."

쓰러진 포수의 옆쪽 포구문으로 내민 불랑기가 화연 한 무더기를 내뿜었다. 그러나 포수 하나를 잃은 포구문 쪽에선 아무도 떨어진 횃불을 집으려 하지 않았다.

"어서 쏘지 못해? 멍청이처럼 뭘 그러고 있냔 말이다!"

후안이 다시 고함을 질렀다. 그러잖아도 험악한 인상이 잔뜩 일그러졌다. 무섭긴 무서웠던지 누군가 횃불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횃불을 포 점화구로 옮기는 순간 또 총성이 들렸다.

"탕."
"컥!"

목이 뚫린 선원이 반사적으로 목을 움켜쥐었다. 쥔 손 사이로 피가 뿜어졌다.

"크으으…!"

이미 넋을 잃은 선원의 몸뚱이가 바닥에서 거칠게 퍼덕거리다가 축 처졌다. 누군가는 삼판(뱃전)에 머리를 박고, 누군가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횃불을 주워드는 자는 없었다.

"냉큼 불을 당기지 못해? 이 겁쟁이 놈들, 동료가 죽어가도 네 한 몸뚱이 온전하면 그만이란 말이지, 응?"

얼굴이 벌개지도록 열을 올리던 후안이 바지춤에 꼽았던 권총을 빼들었다.

"셋 셀 동안 불을 붙이지 않으면 내 손으로 네 놈들을 죽이겠다!"

후안이 부싯돌 점화식 권총인 홀스터 권총의 공이를 뒤를 제끼며 포수들을 겨냥했다.

"하나!"

농담이 아닌 듯 방아쇠울에 걸린 검지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쇠로 만든 총열도 흔들림을 같이했다.

"둘!"

"하겠다고! 하면 될 것 아냐!"

일촉 즉발의 순간에 나이 지긋한 사내가 나서며 횃불을 집었다.

"애초에 이 길로 나서는 게 아니었어! 이게 아니었다고!"

사내는 무엇을 향해 그리 화를 내는지 부두목보다도 더 소리를 지르며 횃불을 들고 포로 다가갔다. 어딘지 죽음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표정이었다.

"꽝."

가져간 횃불을 점화구에 댄다 싶은 순간, 포가 발사되는 폭음 외에도 요란한 소리가 포구문 주변의 뱃전을 때렸다. 포를 발사하느라 몸을 노출했던 나이 든 사내가 뒤로 날려 선창 벽에 쑤셔 박혔다.

사내는 아까의 그 노기 띤 표정을 알아 볼 수 없는 피투성이 고기로 변해 몸이 갈갈이 찢겨 널부려져 있었다. 간접 충격이긴 했지만 몇 사람이 더 피를 흘리며 여기저기 넘어져 있고 권총을 겨누던 부두목도 무릎을 하나를 꿇은 채 벽을 짚고 있었다.

"또 빌어 먹을 산탄포 공격이야."

포구문 옆 쪽에 비켜서 있어서 직접 화를 면한 씨아티엔이 외쳤다. 갑판 위에서 겪었던 악몽의 산탄포였다. 새알 만한 수백 개의 철환이 한번에 엄청난 압력으로 쇄도해오며 걸리적거리는 모든 것들을 휘몰아 찢어버리던 공포. 사람의 몸이든 나무 조각이든 가리지 않고 쓸어 내던 기억이 부르르 몸을 떨게 했다. 두 배가 뱃전을 대하게 되자 포구문 정면이 노출되어 직접 포격을 당한 것이었다.

"여기에 포격하는 일은 없을 거라며?"

넋 나간 거우샹이 씨아티엔에게 원망하듯 물었다.

"바보야! 이건 터지는 폭탄이 아니잖아. 수백 조란환(鳥卵丸)이라구. 쇠구슬로는 유폭이 일어나지 않는단 말야!"

씨아티엔 고함을 지르고 벌떡 일어났다.

"후안 부두목! 정신차려야 합니다. 포격을 그만하고 능노꾼들까지 모두 무장을 해서 근접전…."

씨아티엔이 무엇을 직감하고 부두목에게 외치는데, 그 보다 다급한 목소리가 말허리를 잘랐다.

"아악! 이 놈들이…."

포구문 앞이 일순 꽉 막힌 느낌이 드는 가운데 밖을 내다보던 선원 하나가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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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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