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193회

등록 2005.05.30 08:12수정 2005.05.30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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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비실거리며 웃었다. 얼굴 근육이 비틀려 있는 것 같았다. 너무나 큰 충격에 미쳐가고 있는 듯 했다. 그것을 본 항인이 아이의 등을 가볍게 쳤다.

"왁--!"


아이의 입에서 핏덩이가 쏟아져 나왔다. 비실거리던 아이의 웃음이 멈추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응급조치는 했지만 아이의 상태는 매우 위험하고 불안정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 끔찍한 현장을 본 사람은 이 아이밖에 없었다.

"명이야. 할아버지가 어떻게 된거냐?"

"할아버지… 저렇게 누워 있었어… 저기… 저기서 귀신이 나왔어. 피 묻은 칼을 들고…."

그들은 아이가 가르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담명장군의 초상.

(귀신이 나왔다…?)


처음에는 아이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가 무엇을 본 것일까? 피 묻은 칼을 든 귀신이 저기서 나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명이야… 저기에서 귀신은 나오지 않아.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듯이 저 분은 훌륭한 분이란다. 저 분은 귀신이 나타나지 못하게 하시는 분이야. 할아버지처럼…."


종륜은 아이를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그 초상을 보기도 두려운지 몸을 떨면서 항인의 가슴에 머리를 처박았다.

"아니야… 분명 저 귀신이란 말이야… 스님들은… 검은 옷을 입은 악귀들이… 와서 죽였어. 할아버지는… 저 귀신이 죽였어… 정말이야… 명이는 거짓말 안해…."

아이는 울고 있었다. 울음에 섞인 아이의 말은 분명치 않았지만 종륜과 항인은 아이의 말을 믿어야 할 것 같았다. 강중장군은 거짓말 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분이었다. 아이가 아무리 귀여워도 거짓말을 했을 때에는 용서가 없었다. 그래서 아이는 잘못을 했어도 거짓말로 변명하지 못했다. 아이는 거짓말쟁이가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아이는 더 이상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웅얼거리고 있었다. 아이의 몸이 계속 떨리고 있어 위험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항인은 아이의 수혈을 짚었다. 이런 끔찍한 광경이 펼쳐져 있는 상황에서 아이를 진정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종륜과 항인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담명장군이 담긴 족자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말이 자꾸 걸리고 있었다. 스님들은 흑의인들에게 죽음을 당했다고 했지만 분명 할아버지는 저기에서 나온 귀신에게 죽은 것이라는 말이었다.

바닥에 하나의 글자를 만들고 있는 노주, 그리고 족자에서 나온 귀신. 흑의인들….

하나같이 모를 소리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고 서로의 뜻을 알았다. 그들은 이제부터 조사할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했다. 누가 죽였는지, 무슨 이유로 죽였는지는 그들이 결론 낼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빨리 이곳의 조사를 마치고 오늘 다녀 온 용문장에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노주의 아들. 그 두 사람이 마음으로 감복하고 존경하는 그 분께 이런 소식을 전해드릴 용기는 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노주를 지키지 못한 자신들의 잘못을 빌기도 해야 했다. 그들은 제일 먼저 천왕문부터 조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곳에 남아 있는 흑의인의 시체부터 의문을 풀어야 했다.

아이는 우연히 담천의의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아이는 우연히 담천의가 오해를 받을 수있게 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아주 우연히….

-----------
폭설은 쫓는 자나 쫓기는 자 모두에게 불리했다. 시야를 가려주고 추적을 더디게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쫓기는 자에게 분명 유리했지만 쫓기는 자 역시 움직임에 제약을 받고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는 점에서는 분명 불리했다.

그렇다고 흔히들 답설무흔(踏雪無痕)이니 초상비(草上飛)니 하는 전설적인 경신술이란 것도 화경에 이른 초절정고수가 대적을 만난 듯 내공을 최대한 끌어 올려 십장 이내의 거리를 움직일 때라면 가능할지 몰랐다. 사실 그런 것은 멋스럽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면 몰라도 실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빽빽한 숲 속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렇게 다급하게 쫓기게 된 것은 자신이 가진 비침을 믿고 사용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단 한번의 시도가 물거품이 되자 상대는 오장 이내의 거리로 따라 붙었고, 동료들이 시기 반, 부러움 반으로 항상 말했던 자신의 경신술이 아니었다면 아마 이곳까지 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제 자신들의 동료와 약속한 장소에 도착하고 있었다. 어차피 저 자를 떼어 놓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쫓기는 모습을 보고 동료들이 움직이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자신은 빽빽한 숲으로 뛰어 드는 순간부터 계속해서 기이한 호각을 불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뒤쫓는 자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 주고 있었지만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너무 고음이어서 멀리까지 알리는데 유용한 호각이었다. 하지만 그 호각은 이런 폭설이 내리는 때에는 제 기능을 못하는 것 같았다. 호각소리는 멀리 퍼지지 못했다. 그나마 숲 안으로 들어서자 빽빽한 나무들로 인하여 매섭게 몰아치는 바람을 덜했고, 시야를 가리는 눈보라 역시 훨씬 줄어들었다.

자신의 호각소리는 분명 동료들에게 들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호각의 신호가 적이 따라붙고 있으며 자신이 위험하다는 신호도 파악했을 것이다. 사각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비탈진 언덕을 내려가면서 조심스러웠다. 무공을 익힌 자라도 미끄러지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 균형을 잡는 것이야 이미 무공에 입문하면 처음 시작하는 것이지만 눈이 쌓인 데다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아차하는 순간에 추격해 오는 자는 자신의 등을 덮칠 것이었다.

나무들이 빽빽하다는 사실이 빨리 달리는데 지장을 주고 있었지만 급경사의 언덕을 내려가는 데에 나름대로 도움을 주고 있었다. 최소한 미끄러져도 그냥 내리 밀리지는 않을 터였고, 나무와 나무 사이의 간격을 이용하면 보다 안전하게 내려갈 수 있었다.

헌데 이상했다. 호각을 그렇게 불어대고, 약속한 장소에 닿았는데도 동료들의 기척이 없었다. 아직 일을 끝마치지 못했을리 없었다. 그들이 없다는 것은 오직 한가지 이유였다.

(나를 제외하고 세 명 모두 당했단 말인가? 아니면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 두번째 장소로?)

헌데 그 순간이었다. 그의 귀로 낮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음이었다.

'왼쪽으로 돌아서 위쪽으로 뛰도록…!'

미쳤나? 지금 내려가다가 왼쪽으로 돌아 위로 향한다면 뒤쫓아 오는 자는 중간에서 내려오는 것 없이 가로질러 쫒아 올 것이었다. 그렇다면 쫓아오는 자에게 덜미를 잡힐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전음의 주인공은 자신이 속한 조의 조장(組長)이었다.

실제로 이 일에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가졌고, 자신들의 안전을 책임져 주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경험이 많고 추적을 따돌리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왼쪽으로 몸을 틀면서 다시 비스듬히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에서 무슨 소리인가 들리더니 연이어 쫒아 오는 자의 다급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그를 막은 것 같아 달리는 속도를 늦추자 예의 조장의 전음이 들려왔다.

"다시 우측 아래로 최대한 빨리… 다음 장소로 가도록…."

그는 조장의 지시대로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제 저 자가 쫓아오는 것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었다. 그는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헙…!"

그가 이미 고사해 말라 버린 거목의 옆을 도는 순간 지면이 쑥 꺼지며 발목을 감아드는 무언가에 의해 자신의 몸이 거꾸로 뒤집어지고 있었다. 올가미였다. 눈이 덮여 있었기 때문에 어둠을 헤치는 시야가 있었다 해도 발견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와 동시에 고목의 중간에서 미세한 파공음을 내는 암기가 쏘아져 나왔다.

피잉----!

일곱 개의 독노전(毒弩箭)이었다. 그것은 올가미에 신형이 뒤집어져 올려진 물체가 무엇이든 산적처럼 꿸 수 있을 터였다. 담천의는 자신의 오른발을 옭아매고 허공으로 올리는 줄의 탄력을 이용해 황급히 신형을 더욱 높이 띠우며 급하게 뒤집었다. 검을 뽑아 들며 자신을 향해 날아든 독노전 세 개를 튕겨냄과 동시에 그는 자신의 발목에 연결된 줄을 끊어냈다.

촤르르르---

하지만 그것뿐이 아니었다. 나무 위에서 무언가 내리 꽂히고 있었다. 아마 독노전이 발출되는 것과 위에서 무언가 내리꽂히는 것은 동시였을 것이다. 무언인지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허공에서 방향을 바꿀 수 없자 자신을 덮치는 물체를 피하려 일단 굵은 나무둥치를 안고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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