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205회

등록 2005.06.22 07:59수정 2005.06.22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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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노인은 본래 고지식한 사람으로 관에 줄을 대거나 뇌물을 갖다 바치는 일 따위는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저 자식과도 같은 자기를 빚고 굽는 일이 그가 해 온 유일한 일이었다. 안타까운 일이 있다면 도요를 지켜 나가야 할 유일한 아들놈이 열다섯이 되는 해에 집을 떠나 벌써 십수 년간 통 소식이 없는 것뿐이었다. 손재주가 있는 과년한 딸이 있기는 하나 자기를 빚거나 굽는 일에는 부정을 탄다하여 여자는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어서 어디서 데릴사위나 하나 얻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라면 바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 도요의 불이 꺼졌음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먹고 사는 것이야 그 동안의 명성으로 질그릇이나 옹기 정도 만들어 팔면 걱정을 없을 터였지만 자기를 굽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 남지 않은 그의 여생조차 잿빛으로 만들어 버리는 일이었다.


"조가(趙家) 놈의 짓일 테지… 그 동안 관아를 그렇게 들락날락 하더니만…."

불 꺼진 도요는 을씨년스러웠다. 한쪽 귀퉁이에 산처럼 쌓아 놓은 장작들이 흉물스럽게 느껴졌다. 얼마 전 권가(權家)의 도요에 불이 꺼지고, 헐값에 조가에게 팔았다는 말이 나돈 터였다. 권가의 식솔들이 뭐에 쫓기듯 밤을 타 이곳을 떠났다는 말도 들렸다.

"독(毒)이라고… 내가 구운 자기에서 독이 들어 있다고…? 미친놈들…."

청화백자의 안료(顔料)는 오수토(吳須土:코발트, 망간, 철 등을 함유한 흙갈색의 점토로 대개 코발트가 주 원료임)로 대개 비소(砒素)나 황(黃)을 섞는 관계로 조심스럽게 정제하지 않으면 사람의 몸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오수토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 당(唐) 대부터이니 그런 정도의 기술은 하찮은 옹기꾼이라 할지라도 아는 터였다.

하지만 어떡하랴! 자신이 만든 게 분명한 주자(注子:주전자)에 술을 담아 마신 관료가 갑자기 피를 토했다지 않은가? 죽지는 않았지만 그 현상은 비소에 의한 중독현상이 틀림없었고, 누군가 장난친 것이 분명함에도 지주대인(知州大人)은 조가와 짜고 자신의 죄로 뒤집어씌운 것이었다. 그래도 수대에 걸쳐 이곳에서 살아 온 덕에 모진 고초를 겪지는 않았지만 결과는 죽느니만 못한 것이었다.


인심이라도 쓰듯 여생을 옥에 가두어야 할 것이나 그간 정을 보아 다시는 자기를 굽지 않겠다는 약조를 하게하고는 풀어주었던 것이다. 은근히 도요 역시 조가에 넘기면 좋겠다는 말까지 하면서 말이다. 어차피 자기를 굽지 못할 바에야 후히 값을 쳐준다는 말이 귀에 솔깃할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겠지만 함노인으로서는 자신의 손으로 도요를 부셔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넘기지 못할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함노인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을씨년스럽게 보이는 도요를 자신의 손으로 부셔버려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그의 눈에 장작을 패는 도끼가 눈에 띠었다. 이 놈의 도요를 부셔버리고 이곳을 떠나면 그만일 터였다. 그는 워낙 술을 입에 댄지 오래인지라 몇 잔 만에 비칠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가 도끼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누군가 그에게 말해 준 소리를 떠올렸다.

- 억울하고 힘든 일을 당하면 처마 밑에 하얀 연꽃을 달아 두시오. 힘없고 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그 분이 오신다고 하오. -

얼마 전인가 몇 십 개 정도 연꽃모양의 백자를 주문한 사람이 말했던 것 같았다. 그런 것을 만들어 줄 이유도 없었고, 시간도 없어 거절했지만 함노인은 만들어 주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는 지금이라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한 개가 아니라 몇 개라도 처마에 걸어 놓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로서는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도요에 불을 넣어 티 하나 없이 맑은 연화백자를 구워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몹시 바빠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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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다른 사람처럼 바뀌었다. 상화란 여인은 변장에 독특한 재주가 있는 여자 같았다. 하지만 그 손놀림이 너무나 현란하고 그에 필요한 재료는 너무나 많아 이런 것을 배우려면 아마 꽤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곤란한 것은 상화란 여인과 같은 마차에서 옷을 갈아입는 일이었다.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기는 했어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인피면구를 씌우고 문사 풍의 옷으로 갈아입자, 그는 기골이 장대한 학유(學諭)로 보였다. 마차는 두 번이나 갈아탔다. 거의 한 시진 이상이나 달리다 멈추다 했는데 그 방향은 일정하지 않아 아마 추적하는 자들을 따돌리기 위한 것 같았다.

결국 그들이 도착한 곳은 개봉 최고의 기루인 청화원이었다. 하지만 그를 실은 마차는 청화원의 뒤쪽으로 언제나 굳게 닫혀져 있어 평소에 사용하지 않았던 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상화의 안내로 고아하게 꾸며진 어느 전각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낯익은 네 명의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몽화였다. 이내 전에 맡았던 울금향(鬱金香)이 코로 스며들었다. 그는 왜 몽화와 네 명의 여인이 화장을 짙게 했는지 이해했다. 그가 생각한대로 여염집 여자라면 저렇듯 짙게 화장을 하지 않는다. 기루이니 만큼 짙게 화장을 하는 것이 일상화되었을 것이다.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마치 먼 길을 다녀온 가족이나 친구를 맞는 듯한 말투였다. 상 위에는 채소류의 간단한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그는 가볍게 포권을 취하고는 몽화와 맞은편에 앉았다.

"이곳은 매우 고아하고 조용한 곳이구려."

"마음에 드시나요? 더구나 이곳 십장 안으로는 소첩의 허락이 없는 한 아무도 들어 올 수 없죠."

"처음이라 그런지 얼굴에 씌운 이것은 매우 갑갑하구려. 상화 낭자는 이것을 떼어 주시겠소?"

인피면구는 어차피 약물을 사용해 붙이는 것이다. 처음 사용하는 사람은 얼굴에 가면을 씌어 놓은 듯 갑갑하고 불편하다. 몽화가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한 동안 그 모습이 나을 것 같지 않은가요? 귀찮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을 텐데."

"좋은 생각이오. 이 모습이라면 당신들만이 알아 볼 수 있을 테니 말이오."

부드럽게 말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 내용은 상대를 믿지 않고 있다는 의미도 있었다. 몽화는 나직이 탄식을 하고는 상화에게 눈짓을 했다. 상화는 조심스럽게 약물을 바르더니 인피면구를 떼어냈다. 그리고는 천으로 그의 얼굴에 묻은 찌꺼기까지 말끔하게 닦아냈다.

"확실히 본래 얼굴이 보기 좋군요."

"유탐화의 일을 봐주고 있소?"

갑작스런 담천의의 물음에 몽화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한동안 그를 살펴보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당신은 얼마 전과는 달리 참을성이 없어졌군요."

"이제는 굳이 참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뿐이오. 때로는 참는 것보다 몸이 먼저 움직여야 할 필요도 있소."

담천의의 말에 몽화는 미소를 걷어 들였다. 이 사람을 만나본지 겨우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암울한 느낌이 여전했지만 느긋함은 가시고 강인하고 예리한 느낌이 들었다. 무엇이 그를 저리 변화시킨 것일까?

"좋아요. 나는 유탐화를 돕고 있어요."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다. 담천의는 다시 물었다.

"이제 무슨 이유로 나를 이곳까지 데려왔는지 설명해 주시겠소?"

그의 다그침에 몽화는 고운 아미를 찡그렸다. 그녀가 그런 표정을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당신은 참을성이 없어졌을 뿐 아니라 비단 성급하기까지 하군요. 시간은 충분해요. 당신은 지금 뚜렷하게 갈 곳도 없을 뿐 아니라 소첩에게도 묻고 싶은 것이 많을 거예요."

"내 마음을 너무나 잘 아시는구려. 그렇지만 나는 당신과 거래하고 싶은 마음은 없소."

정말 담천의의 태도는 의외였다. 그의 말은 도움을 주겠다는 의도를 가진 사람에게 무례하기까지 했다. 몽화는 놀란 듯 눈을 다시 동그랗게 떴다. 이 자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제 스스로에 대해 모두 안 것일까? 그녀는 일단 그가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음을 느꼈다.

"소첩을 믿지 못하겠다는 건가요?"

"내가 당신을 믿어야할 이유가 있소?"

이제는 노골적인 적대감이었다. 몽화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무슨 말까지 들은 것일까? 천지회에 대하여 이 자에게 모함이라도 한 것일까?

"우리는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어요. 아니 친구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적이 되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이미 당신은 우리를 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군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소. 하지만 친구가 되려면 자신을 내보이는 것이 우선이오. 그리고 상대를 이용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하오. 그것이 또한 최소한 적이 되지 않는 길이오."

분명히 무언가 알고 있었다. 전과는 확실하게 달라졌다. 그녀는 신검산장 안에서 일어난 일의 대부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섭장천과 마노란 노인은 그에게 얼마나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해 준 것일까? 그녀는 우회적인 방법보다는 단순한 것이 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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