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204회

등록 2005.06.21 08:00수정 2005.06.21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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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2 장 연화백자(蓮花白磁)

호노삼(胡老三)은 평생 농사만 짓고 살아 온 사람이었다. 그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했으며 그의 평생소원이 있다면 자신이 농사를 지을 땅 한 뙈기라도 가져봤으면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종이었고 당연히 그에게 한 뼘의 땅조차도 남겨줄 수 없었다. 그 역시 종이었고, 열심히 일한 덕에 돌아가신 주인의 눈에 들어 면천(免賤)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식에게 한 뼘의 땅조차 물려주지 못할 것이었다. 물려주기는커녕 당장 장성한 자식을 장가보내고 분가를 시키는 것조차 너무나 힘들었다. 면천은 했다지만 소작(小作)을 하는 그에게는 입에 풀칠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전 주인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먹고 입는 것을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분이 돌아가시고 그 아들이 물려받으면서 요구하는 소작료는 감당하기에 너무 어려웠다.

그 동안 땅을 사기 위해 모으던 돈마저 먹고 입는데 헐어 써야 했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렇듯 농한기(農閑期)에는 산에라도 올라 약초를 캐고, 사냥도 해 보았지만 그저 찬거리에 불과할 뿐 돈이 되는 일이 아니었다. 업보처럼 짊어진 가난을 벗어날 방도가 없었다. 하기야 이미 쉰 중반을 넘은 그야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의 자식 대까지 이런 곤궁한 가난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것이 더 가슴 아픈 일이었다.

오늘도 그는 새벽부터 산을 헤매고 돌아왔지만 빈손이나 다름없었다. 좀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다면 나을 터지만 그는 사냥꾼이 아니라 농부였다. 그가 가진 무기라곤 기껏 낫 정도. 그것으로 사나운 맹수를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지. 빌어먹을 놈의 세상!"

그는 싸구려 박주(薄酒)를 들이켰다. 다른 소작인들과는 달리 전 주인으로부터 받은 은혜로 지금 이 지역 토호(土豪)로 행세하는 그 아들놈을 드러내 놓고 욕할 처지도 아니었다. 하지만 홀로 있을 때면 자신을 면천시켜준 그 전 주인이 생각나는 것이다. 그 때는 그래도 소작인들이 살만했다. 간혹 지독하게 돈을 모은 자는 야산 중턱의 척박한 땅이라도 사 자경(自耕)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겨울이 지나 춘궁기에 접어들면 여지없이 풀뿌리라도 캐어 먹어야 할 판이었다. 어떤 놈들은 부모 잘 만난 덕에 첩을 몇 명씩이나 꿰차고 입맛타령이나 해대는가 하면 하루에 한 끼만이라도 제대로 먹을 수 있다면 감지덕지 하는 사람도 있었다.

"더러운 세상이야."


그는 다시 사발에 술을 따라 들이켰다.

"뭐가 그렇게 더러운 세상이라고 신세타령을 해대고 있는가? 산에 가 별로 수확이 없었던 모양이지?"

아마 그의 푸념을 들은 모양이었다. 옆집의 왕노인이 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세살 터울이었지만 왕노인은 이가 빠져 훨씬 늙어 보였다.

"술 한 잔 걸치시려오?"

"좋지. 그래도 자네는 낫구먼. 박주일망정 술을 마실 수 있으니 말이야. 다른 집들은 끼니 걱정에 정신이 없더구만."

난리는 난리였다. 이번 여름 장강(長江)의 범람으로 흉작이 들어 소작료를 물고 나니 추수한지 세 달도 못가 벌써 떨어진 모양이었다. 돌아가신 전 주인이라면 그나마 사정을 봐주어 소작료를 감해주었을 터이지만 그 자식 놈은 악착같이 거둬들이는 통에 이 지경이 된 것이다. 하기야 들은 풍문이지만 소작인들이 배부르면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평소 지론이라더니 맞는 말인 듯 했다. 그는 왕노인에게 술을 따라 건넸다. 왕노인은 술잔을 건네받자마자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들이켰다. 요기까지야 되지 않는다 해도 주린 배를 속이는 데는 그만이었다.

"세상이 뒤집어진들 우리네 삶이 펴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 같은 민초들이야 지주라도 잘 만나야 그럭저럭 살 텐데 지 애비 잘 만나 저리 사는 것은 모르고 그토록 패악을 떠니…."

본격적으로 신세타령이나 할 모양이었다. 말이 나오기 무섭게 하가(厦家)의 젊은 주인 기진(起振)을 욕한 지 벌써 오년 째였다. 그는 다시 왕노인의 사발에 술을 따랐다.

"몇 집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이곳을 떠날 모양이야."

부어지는 술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는 게 왕노인 역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아들인 왕일이 항상 푸념처럼 떠나겠다고 말을 해오던 터였다. 하지만 자신이 자란 고향을 떠난다고 어디에 발을 붙일 수 있을까? 고향 떠난 사람치고 다시 돌아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어딜 가면 다를 게 있겠소?"

"아니야…."

왕노인은 바라보던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첫잔을 급히 들이키더니 술기운이 도는 모양이었다.

"하가 놈처럼 지독한 지주도 없다더군. 다른 곳 역시 흉작이 들긴 마찬가지였다고 들었어. 다른 곳에서는 명년에 더 받기로 하고 소작료를 절반으로 깎아 주었다더군."

다른 지주라 해서 모두 그러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대개 자신들이 유리한 말만 귀에 들어오는 법이었다. 하지만 쌀 한 톨을 아끼는 민초들에게 있어 그것은 부처님의 자비로운 은혜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 정도라면 넉넉하지는 못해도 최소한 다음 추수 때까지 연명을 할 수 있을 터였다.

자신도 역시 하기진의 처사가 야속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 부친을 보아 호노삼은 말을 아끼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모를 왕노인이 아니다보니 뭔가 말을 할듯하면서도 주저하는 듯 했다. 그러다 왕노인은 머리를 그에게 가까이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자네 연화(蓮花) 하나 만들어 걸지 않을텐가?"

"연화라니… 관등절(觀燈節)도 아닌 때에 웬 연화요?"

사월초파일의 관등절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식구 숫자에 맞추어 연등을 만들어 거는 것이 상례였다. 명절 중에서도 손을 꼽을 정도로 큰 명절 중의 하나가 관등절이었다.

"조악하게 만들어도 괜찮고, 굳이 등을 넣어 만들 필요도 없네. 그저 흰색으로 만든 연화를 처마 밑에 걸어 놓으면 우리 민초들에게 복된 세상이 올 거라 하더구만. 손해 볼 것 없으니 오늘밤이라도 당장 만들어 걸어 놓게나."

그는 왕노인의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씁쓸한 실소를 머금었다. 집안에 부처를 모시고 치성을 드려도 안 되는 것이 자신들의 삶이다. 복된 세상은커녕 뜯기지만 않게 해 달래도 안 되는 판에 단지 연화 하나 걸어 놓았다고 복된 세상이 올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더구나 흰색 연화라니….

"내 부탁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어 걸어 놓게. 집집마다 그것이 걸리고 나면 정말 좋은 일이 있을게야. 호광(湖廣)의 어느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그것을 걸어 놓았더니 지주가 직접 거둬들인 소작료를 모두 돌려주었다더군."

귀에 솔깃한 말이었다. 이미 호노삼의 기색을 안 왕노인이 사발의 술을 마저 들이키고는 그에게 건넸다. 그는 사발에 술이 차오르는 것을 보며 왕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요사이 몇 집에서 그런 연화를 본 적도 있는 것 같았다. 관등절도 아닌데 왜 걸어 놓았을까 의문이 일었지만 그냥 흘려보았다. 이제 보니 그들 역시 왕노인과 같은 생각에서 그런 것 같았다.

"까짓 것 연화 하나 만드는 게 뭐 대수겠소."

성의 없는 그의 대답에 왕노인은 안심이 안 되는 듯 재차 말을 이었다.

"꼭 만들어 걸어 놔. 혹시 아는가? 정말 우리 민초들에게 복된 세상이 올지…."

호노삼은 고개를 끄떡이고는 사발의 술을 쭉 들이켰다. 제발 그런 날이 왔으면 하는 바람은 그가 왕노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터였다.

경덕진(景德鎭)에서 함노인(咸老人)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대에 걸쳐 이어온 가문의 도예(陶藝)는 중원 자기(瓷器)의 중심부인 경덕진 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경덕진은 한(漢) 시대부터 도자기로 유명한 곳이다. 당나라 때의 절강 월요(越窯)의 청자(靑瓷)와 하북 형요(邢窯)의 백자(白瓷), 그리고 송나라 때 하북 정요(定窯)의 백자, 하남 균요(鈞窯)의 균자(鈞瓷), 절강 용천요(龍泉窯)의 청자(靑瓷)와 더불어 최고로 치는 도자기 생산지.

부근에 질 좋은 도토(陶土)가 많아 송(宋)대에는 경덕진요(景德鎭窯)에서 나는 도자기는 공품(貢品)으로 유명하였고, 그 종류도 다양하여 일반 옹기(甕器)는 물론 각종 병과 주자(注子:주전자), 매병(梅甁), 합(盒), 완(碗:주발)과 발(鉢:바리) 등이 생산되었는데 특히 청화백자(靑花白瓷)는 유명하여 중원 뿐 아니라 정화(鄭和) 태감(太監)이 이끄는 수차례의 남해원정에서도 반드시 실려 있는 품목이었다.

흰 바탕에 남색 문양이 있는 청화백자는 생산되기 무섭게 중원 각지로 팔려나갈 정도였고, 특히 함노인의 도요(陶窯)에서 생산되는 청화백자는 이미 생산되기도 전에 임자가 줄을 서고 있는 실정이었다.

헌데 꺼지지 않아야 할 함노인의 도요는 관가의 부름에 세 번을 다녀 온 뒤 불기운을 볼 수 없었고, 재촉하는 상인들의 요구에도 묵묵부답하며 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다. 도공(陶工)에게 있어서 술은 독약과 다름없었다. 손이 떨리면 매끄러운 선이 나오기 힘들고 그 모양 역시 여인의 몸맵시를 닮은 선연한 자태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 산 속에 들어가 쏟아지는 폭포수에 마음을 가다듬고 몸을 청결하게 한 다음에 모든 세상사를 잊고 빚기 시작하는 것이 함노인의 오랜 습관이었다. 이렇듯 술을 마시는 것조차 금기로 여기던 일.

하지만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불 꺼진 도요를 바라보는 함노인의 표정엔 절망감이 가득했다. 이유는 한가지였다. 명 태조부터 이곳에는 어기창(御器廠)이 세워진다는 말이 돌았다. 황실에서 사용하는 모든 그릇을 생산하는 어도요(御陶窯)가 지정된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어느 도공이 지명될지가 경덕진 내에서 크나 큰 관심사가 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각 도요가(陶窯家)마다 관에 줄을 대느라 열심이었고, 가끔 중앙 공부(工部) 영선소(營繕所) 소속 정팔품(正八品)의 소부(所副)가 내려온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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