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역사소설> 흐르는 강 96

대원군 집정기 무장개화세력의 봉기, 그리고 다시 쓰는 조선의 역사!

등록 2005.06.23 15:51수정 2005.06.23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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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억, 허억…."

윤석우는 절망감을 느꼈다.


'더 이상의 싸움은 의미가 없다. 나는 진 것이다.'

거리를 유지하고 방어세를 취하는데 권기범이 더 이상 달려들지 않았다. 마음을 읽었으리라. 그러나 기왕 시작한 싸움이니 어느 쪽이 넘어지든 승부는 내야했다. 상대가 서서히 다가왔다. 다소 거친 호흡을 뱉고는 있으나 안정적인 자세였다.

윤석우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마지막 합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멋진 승부였으나 자신이 패자의 역을 맡아야 한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허나 스스로 자초한 일.'

윤석우가 앞발의 힘을 빼고 허보를 두었다. 상대보다 빠른 공격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닿을 듯 떨어질 듯 보폭을 좁힌 권기범이 날아올랐다 싶은 순간 윤석우의 앞발이 쏘아졌다. 그러나 권기범은 금마세를 취하며 왼발만 접었을 뿐 오른 발은 아직 땅에 댄 채였다.


'앗, 내 허보를 읽혔다. 이럴 수가.'

뻗은 앞발에 걸리는 느낌이 오질 않자 윤석우는 실패를 직감했다.


팡-

장(掌)으로 밀어치는 권기범의 공격을 반사적으로 막아냈다. 그러나 화살을 쏘듯 튕겨내는 발경(發勁)의 힘이 그대로 충격으로 화했다.

'자기의 세는 순하게 하고 상대의 세는 융통성이 없게 한다. 상대의 중심을 한쪽으로 치우치게 함으로써 그 초점이 드러나게 한다.'

가슴과 손목부위의 통증을 느끼며 경탄을 하는 것도 잠시. 이어 권(拳)이 찍히는 듯싶더니 절묘하게 꺾인 팔꿈치가 광대뼈로 날아들었다.
고개를 살짝 숙여 피했다 싶은 순간 다시 권기범의 왼쪽무릎이 솟아올랐다. 실로 숨 돌릴 짬이 없는 공격이었다. 윤석우가 다시 허리를 퉁기며 땅재주를 넘었으나 권기범의 굽은 무릎이 펴지며 발끝이 매섭게 파고들었다.

"파… 팔비장!"

윤석우가 겨우 몸을 틀며 비명처럼 내뱉었다.
신체 각 부위의 초절, 중절, 근절의 힘을 극대화하고 양 주먹과 양 발 뿐 아니라 양 팔꿈치, 양 무릎을 연계하여 여덟의 신체부위를 온전한 무기로 사용하는 자. 그저 말로만 들었을 뿐 이런 식으로 구현해 내는 자가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권기범이 두발 낭성으로 도약했다. 윤석우도 뛰어 오르면서 오른발을 들어 앞을 향해 올려 찼다. 이기각의 자세.

"끄허어…."

권기범의 왼쪽팔꿈치가 윤석우의 발차기를 막아낸 가운데 윤석우는 왼손으로는 권기범의 왼쪽무릎을 막고 오른 손으론 오른쪽 팔꿈치를 동시에 막아내었으나 비어있는 미간으로 권기범의 박치기가 들어와 있었다.

윤석우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우지 못한 채 멀거니 뒤로 넘어갔다. 권기범이 숨을 고르며 내뱉었다.

"미안허이. 실은 구비장이라네."

머리의 두개골은 매우 단단하여 강력한 무기가 됨에도 공격자가 치명적 상처를 입을 수 있어 금기시하는 부위였다. 네 곳의 초절과 네 곳의 중절 외에 최후의 중절인 머리가 포함되는 구비장이라면 상대에게 팔비장임이 노출됐다 해도 최후의 일격을 가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비로 흥건한 동헌 마당에 대자로 누운 윤석우를 뒤로 하고 권기범이 돌아섰다. 포교와 나졸들이 움찔하며 몇 걸음을 뒤로 물렸다.
누워있는 윤석우를 보면서도,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자기 눈을 의심하는 듯 멍한 표정들이었다.

권기범이 박규수에게 다가오자 포교 둘이 칼을 빼들고 박규수 앞을 막아섰다. 그 와중에도 정신을 차리고 있는 자들은 그들뿐이었다.

"대감,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저 군관은 하루 이틀만 몸 구완을 하면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권기범이 박규수에게 공손히 말했다.

"그만하길 다행이네만, 만일 윤 비장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자네의 목숨도 없을 것이야."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 소인은 이만."

권기범이 목례를 올리고 동헌문으로 향했다. 나졸들이 물살처럼 갈라졌다. 문을 빠져 나가도록 아무도 뒤를 따르지 못했다.

"무슨 일이옵니까?"

장수 하나가 외치면 뛰어오는 가운데 일군의 무리가 뒤따르고 있었다. 중군(中軍)이 인솔하는 감영의 증원군이 당도한 것이었다. 어림잡아 스무 명. 그래도 병방이 병방 노릇을 한다고 중군에게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이미 상당수의 병력이 감영문을 틀어막은 채 중군의 병력이 다가왔다.

"다시 귀찮게 되었구나."

권기범 일행이 멈추어서 잠시 눈빛을 교환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나으리, 여깁니다요 여기!"

저편 담벼락 위로 삿갓 쓴 누군가 고개를 내밀고 소리쳤다.

"저쪽으로!"

권기범 일행이 그제야 방향을 잡은 듯 후다닥 뛰었다. 어떤 상황인지 모르고 우르르 몰려오던 감영의 군들이 화들짝 놀랐다.

"뭣들하는 게야. 저자들을 잡아라!"

중군이 소리치자 군졸들이 제각각 뛰기 시작했다. 권기범 일행과 군졸 사이의 거리 대략 삽십 보. 권기범과 담장 사이 거리 삽십 보. 그러나 권기범 일행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담장까지 질주했다.
어른이 팔을 뻗은 높이가 훨씬 넘는 담장 위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삿갓이 권기범을 뒤쫓는 감영군을 향해 발화통을 던지려 하였다.

"아서라!"

권기범이 달리는 와중에도 손사래를 치며 제지시켰다. 여기서 피를 보게 되면 모든 게 끝이었다.
권기범 일행이 담 쪽으로 접근하자 감영군들은 내심 독안에 든 쥐로 여기며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 호위 하나가 담장에 등을 대고 손에 깍지를 꼈다. 권기범이 속도를 줄이지 않고 내달려 깍지 낀 손을 딛고 그대로 담장 위를 짚었다. 그리고는 훌쩍 담장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따르던 호위도 같은 동장으로 담장을 뛰어 넘자 담장 위의 삿갓이 손을 내밀었다. 담장을 등지고 섰던 호위가 손을 맞잡고 담벼락을 차오르며 담장 위로 올랐다.

이 모든 게 눈 깜짝 사이였다. 날다람쥐 같은 그들의 동작에 뒤쫓던 감영군들이 눈만 멀뚱거리며 닭 쫓던 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외벽 담장도 그렇게 쉽사리 넘어서 달아났을 것이었다.

"뭣들 하는 게야! 어서 저자들을 뒤쫓지 않고!"

중군이 정신을 차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군졸들이 문 쪽으로 뛰쳐나가려는 자, 뒤뚱대며 무등을 타고 담장을 넘으려는 자로 수런거렸다.

"중군. 그럴 것 없네."

관찰사 박규수의 말에 군졸들이 잠시 주춤했다.

"어차피 나를 찾은 손님인데 잠시 오해가 있어 소란이 일었던 게야. 괜한 수고할 것 없네."

말을 마치고는 박규수가 동헌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졸들은 윤석우 군관을 옮기느라 부산을 떨고 중군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빗줄기가 더 거세지는 가운데 어디선가 말발굽이 멀어져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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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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