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2부 97

끝나지 않은 싸움

등록 2005.06.24 17:02수정 2005.06.24 18:04
0
원고료로 응원
“날 이리로 부른 이유가 뭡네까?”

이종신은 최효일을 힐끗 노려본 뒤 장판수에게 앉을 것을 권했다. 하지만 장판수는 행여 다른 흉계가 있을 것 같은 기분에 그대로 서서 말했다.


“괜찮습네다. 보아하니 모두 저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분들인데 어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있갔습네까?”

이종신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자리에 앉았다.

“자네 말투를 보아하니 평안도 내기구먼. 전쟁도 끝났으니 이젠 고향에 가봐야 하지 않겠나?”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되었습네다. 남한산성이 제 고향이나 다름없게 되었습네다.”
“그럼 가족 친지들은 어디에 있나?”
“가족은 지난 정묘년 병화 때 잃었고 지금은 홀몸입네다.”

장판수는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가족 얘기에 마음 한구석 깊은 곳이 슬며시 아려왔다. 이종신은 장판수의 딱딱했던 태도가 약간 느슨해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제 전란도 끝났으니 평안한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나? 내 자네의 공을 조정에 아뢰어 상을 받게 하고 매파를 보내어 혼인도 주선할 터인즉, 이만 이곳을 떠나는 것이 어떠한가?”


장판수는 아무런 말이 없었고 뜻밖의 말에 최효일과 장막 뒤에서 이를 엿듣고 있던 차예랑은 당장 그 진의를 의심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고맙겠습네다만, 제가 왜 여기를 떠나야 됩네까?”


이종신은 한숨을 푹 쉬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지금 남병사 서우신 나으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나? 그는 많은 병사를 거느리고도 전란 중에 어가를 구하러 가지 않았네. 무슨 이유가 있든 간에 조장에서는 그 죄를 엄히 묻게 될 걸세. 그게 두려우니 자네를 이용해 조금이라도 죄를 덜어보려 하는 것을 모르겠나?”

장판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모르갔습네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대답에 이종신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장판수는 언제 체면을 차렸냐는 투로 자리에 비스듬히 주저앉으며 소리쳤다.

“내래 지금 와서 병사나으리의 죄를 덜어 주겠다는 게 말이 된다고 보지 않습네다! 조정이야 전란이 끝났다고 하겠지만 지금도 밖에서는 오랑캐들에게 백성들이 도륙당하고 끌려가고 있습네다! 조정이 뭡네까! 항복 했다고 그 꼴을 두고 보고 있는 게 조정이고 임금의 도리입네까!”

“말을 삼가라!”

이종신의 옆에 있던 군관이 칼집에 손을 대며 엄포를 놓았지만 장판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조정의 명조차 없는 지금에 와서야 병사를 움직인다면 병마사 나으리는 오히려 죄를 더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네다! 그게 와 그런다고 생각하십네까? 썩은 조정이 아니라 백성들을 구하는 것이 더 큰 일이 아닙네까?”

“저, 저런 역적놈을 봤나!”

장막 안에 있는 문무관과 군관들이 손가락질하며 소리쳤지만 누구하나 함부로 칼 잘 쓰기로 소문난 장판수에게 달려들지는 못했다. 이종신도 낯빛만 붉어질 뿐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야심한 때에 신소리 잘 듣고 갑네다. 그네들도 백성들에게서 거둔 나라의 녹을 먹고 있는 자라면 다시 생각해 보시라우요!”

장판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장막을 나갔고 최효일도 뒤를 따르며 소리쳤다.

“나도 장 초관과 뜻을 같이 할 것이오! 부장 나리의 비열한 수작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 다시는 그러지 마시오!”
“저 놈이!”

마침내 이종신이 크게 화를 내며 장막 안에 있는 긴 창을 뽑아 최효일을 찌르려 했다. 장판수가 몸을 돌려 급히 이를 막으려는 찰나, 이미 최효일은 이종신이 내어지른 창날을 피해 창대를 잡고서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말로는 안 되니 이젠 힘을 쓰시겠다는 것이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2. 2 추석 때 이 문자 받고 놀라지 않은 사람 없을 겁니다 추석 때 이 문자 받고 놀라지 않은 사람 없을 겁니다
  3. 3 "X은 저거가 싸고 거제 보고 치우라?" 쓰레기 천지 앞 주민들 울분 "X은 저거가 싸고 거제 보고 치우라?" 쓰레기 천지 앞 주민들 울분
  4. 4 지금도 소름... 설악산에 밤새 머문 그가 목격한 것 지금도 소름... 설악산에 밤새 머문 그가 목격한 것
  5. 5 아직도 '4대강 사업' 자화자찬? 이걸 보고도 그 말 나오나 아직도 '4대강 사업' 자화자찬? 이걸 보고도 그 말 나오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