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2부 99

끝나지 않은 싸움

등록 2005.06.28 17:03수정 2005.06.28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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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에서 나온 계화는 또 다시 폐허가 된 궁말로 발길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궁말에 모습을 보이며 사람 사는 모양새가 나기 시작했지만 김아지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계화는 서러운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당장 끼니조차 해결하기 어려울지언정 적어도 곁으로는 계화의 표정에서 결연함마저 보일 정도였다. 계화는 불에 타다 남은 서까래만 뒹굴고 있는 집터에 웅크려 앉아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을 거듭했다.

'이제 어찌 먹고 살까나… 길쌈이라도 해서 살기에는 당장 어렵고 쓸 만한 남정네를 만나 몸을 의지하려니 이 또한 막막하고… 하늘이 무너져도 살길이 있다고 하니 하루하루를 때우면 좋은 일이 있지 않을까….'


나이가 들어 궁 밖으로 나간 통통한 궁인이 쭈그려 앉아 있는 계화를 보고서는 혀를 끌끌 찼다.

"에구… 전에 살던 집입갑네."
"……예."
"하여간 남정네들이 못났으니 우리 여인네들이 이런 수난을 겪는 게 아닌가."

통통한 궁인은 계화의 옆에 앉아 계화가 듣던지 말든지 주저리주저리 말을 이어갔다.

"난 난리가 났다는 소식에 당장 속곳만 들고서는 남쪽으로 줄행랑을 놓았지 뭔가? 몸이 부서져라 궁에서 생활한 삯도 이곳에 내팽겨 치고서는 부모님을 찾아 동래까지 내려갔네. 그렇지만 어디 동래도 평안하던가? 왜인들이 오랑캐들과 손을 잡았다는 소문이 돌아 뒤숭숭하기만 했다네. 늙으신 부모는 날 이미 잃은 딸자식 취급하였기에 난리가 끝나자마자 다시 이곳으로 올라온 게지. 그런데 나야 늙고 쓸모없는 계집이라 이곳에 온 것이지만 자네는 아직 젊고 앞길이 창창한데 왜 이 궁말에 와서 미적거리는가? 나와 같이 다른 곳으로 가서 살아보지 않으려나?"

계화는 통통한 궁인이 별로 믿음은 가지 않았지만 막막한 기분에 조금은 귀가 솔깃해졌다.


"다른 곳이라면 어디를 말하는지요?"
"난리에 사람들도 많이 잡혀가니 오히려 기회가 온 것일 수도 잇지! 어디 목 좋은 데에 들어서 객주라도 차려놓고 있으면 두 입 먹고 사는 데 넉넉하지 않겠나?"
"밑천이나 있어야죠."

통통한 궁인은 깔깔거리고 웃으며 계화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여인네 밑천이 몸뚱이지 뭘 그리 모른 척 하는겐가?"
"에이구머니! 그 무슨 망측한 말이오!"

계화는 노골적인 말에 기분이 나빴지만 통통한 궁인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거 '내가 한때 궁에서 생활했는데.' 하고 체면만 차리면 여기서 뭘 먹고 살겐가? 나야 입심이라도 있지만 남정네 후려치는 반반한 낯짝은 없으니 자네를 잡고 사실대로 말하는 걸세."

그 때 거리 한쪽에서 여인네들의 울부짖음이 메아리쳐 울려 퍼졌다.

"달자(몽고 오랑캐들을 일컫는 말)들이 쳐 들어왔다!"

통통한 궁인이 계화의 손을 잡고 부리나케 내달리기 시작했다.

"어서가세! 그 놈들은 사람도 아니네! 조정에서 청을 해 그 놈들이 사대문 밖으로 밀려 나갔다고는 하나 가끔씩 몇몇 놈들이 이렇게 들이닥치고는 하네!"

궁말을 습격한 말 탄 몽고병은 다섯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를 저지할 이는 아무도 없었고 더욱이 여인들만 있는 마을 인지라 그 무기력함은 더욱 심했다. 몽고병들은 길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계화와 통통한 궁인을 보고서는 게슴츠레한 눈을 번뜩이며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에구머니!"

계화가 비명을 질렀고 몽고병은 먼저 통통한 궁인을 사로잡으려 말 위에서 손을 뻗었다. 계화는 뾰족한 돌을 집어 되는 대로 집어 던졌고, 이는 우연히 말의 눈에 맞아 몽고병은 앞말을 쳐든 말 위에서 볼썽사납게 목부터 떨어지고 말았다.

"아이고!"

찢겨진 옷자락을 부여잡으며 몸을 추스르려는 통통한 궁인은 그 찰나에 땅바닥에 쓰러져 몸을 한 차례 떤 후 움직임이 멈춘 몽고병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운 없는 몽고병은 말위에서 떨어진 후 목뼈가 꺾여 즉사하고 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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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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