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4 장 살천문(殺天門)
청화원 내원에 있는 조용하고 아담한 전각이었다. 분명 기방(妓房)은 아니었고, 고아한 풍취를 가진 사람이 머물던 곳 같았다. 너무나 고요해서 시간이 정지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곳에 들어선 담천의는 한순간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을 보고서야 몽화가 왜 짓궂은 미소를 지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하령…? 당신…."
탁자 위에 음식을 가지런히 놓다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그를 보는 순간 그녀는 왈칵 눈물부터 솟구쳤다. 이미 그에 대한 것은 유곡으로부터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일까? 날개가 꺾인 대붕(大鵬)처럼 음울함을 가지고 있던 그를 생각하며 그녀는 같이 아팠다.
반드시 만나게 해 주겠다고 하는 말도 그리 믿지 않았다.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고 그가 찾아 올 수 있을까? 그러다 그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긴가민가했던가? 그녀는 작은 새가 날아들 듯 담천의의 품으로 안겨 들었다.
"…!"
입이라도 열라치면 울음부터 나올까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의 품에 안겨 잔경련만 일으켰다. 그 역시 여기에 왜 그녀가 있는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가 여기에 있고, 자신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렁그렁한 눈물을 담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에 각인하듯 바라보다가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문득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두 사람의 입술이 다가 들었다. 그녀의 몸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와 헤어진 이후로 자신은 그녀를 생각할 시간조차 제대로 가지지 못했다. 사내란 본래 그렇다. 무언가에 몰두하게 되면 곁에 있는 사랑하는 이 마저 소홀하게 된다.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서가 아니다. 하지만 여자는 다르다. 헤어져 있어도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스스로 그려간다. 끊임없이 자신의 세계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하고, 또 그 사랑을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심장 고동과도 같이 그의 사랑을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 못내 그의 아픔이 가슴 속을 아리게 하는 것을 느끼며 속울음을 울고 있었다.
하늘이여…!
이 사람의 고통을 제게 주시옵소서….
탁자 위에 황촉불이 일렁거리고, 그 위에 놓인 음식이 식어가는 가운데 유독 두개의 술잔이 마주보고 있었다. 어쩌면 잠시 후 합환주(合歡酒)가 담길 잔인지도 몰랐다.
------------
중년인은 금색으로 수놓은 자포(紫袍)를 걸치고 있었다. 목상처럼 표정이 없는 그는 겨울 임에도 창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칼로 깎은 듯 그의 이목구비는 반듯했다. 너무 얼굴선이 깨끗해서 정말 목상으로 깎은 것이 아닌가 할 정도였다.
"영목(楹牧). 설명 좀 해주겠나?"
그 방의 문 쪽으로는 한 사내가 부복하고 있었다. 연배는 자포를 입은 중년인과 비슷한 것 같았다. 다만 그의 얼굴은 동안(童顔)이어서 언뜻 보기에는 삼십대로 보였다.
"속하 역시 사전에 보고받은 바 없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침중했다. 어쨌든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자신의 불찰이었다.
"우리 형제 열명이 한꺼번에 움직여야 하는 일에, 더구나 강남도 아닌 화북에서 일을 수행하는 일에 총타수(總打手)가 모르고 있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중년인의 말은 영목이란 인물을 나무라고 있었지만 어조는 그저 친구와 대화하는 듯했다. 그의 시선 역시 여전히 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 변함이 없었다.
"더구나 그 일에 참여한 열명 중 아홉 명의 형제들이 당했다고 들었네. 그런 일에 자네의 비표(秘標)없이 수행되었단 말인가?"
이미 문주(門主)는 누군가에게 벌써 내용을 보고받은 모양이었다. 숨길 일도 아니었지만 너무 쉽게 넘긴 것이 이렇듯 중대한 사태까지 벌어진 것이다. 그 역시 일이 터지고 나서야 어찌된 연유인지 알아보고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던 터.
"속하의 잘못입니다. 문주님께 보고 드렸어야 함에도 너무 간단하게 생각했습니다."
"부문주 황임(黃臨)이 시킨 일인가?"
영목은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부문주라 하나 문파의 일에 등한시하고 있는 그를 지목한 것은 이미 문주가 이 일의 내막을 소상히 알고 있음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숨길 일도 감추어줄 일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고하면 된다.
"큰 건이었습니다. 대금도 선불로 들어왔고 오랜 만에 부문주께서 주선한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이런 사소한 일까지 문주께 보고해야 물으시기에 조용히 처리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마 황임은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비치었을 것이다. 문파의 일에는 관심이 없이 술과 계집을 끼고 사는 그가 가져 온 일에 대해 생색을 내도록 영목은 최대한 협조를 하려 노력했을 것이다. 사실 어지간한 일들은 자신에게까지 일일이 보고하지 않고 처리하라고 말한 것도 자신이었다.
"사소한 일이라…."
그들의 일이란 것은 무엇보다 신속을 요구되는 일이었고, 정확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 해도 영목은 형제 열 명을 동원할 일이라면 보고를 하는 것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대상도 스물대여섯 정도의 청년 한명 이었고, 마침 화북에 있던 형제들이 괜찮았기에 이런 불상사가 날지 몰랐습니다."
"그 대상이 담천의란 청년이었나?"
영목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당황스러웠다. 문주가 그 대상의 이름까지 알고 있다면 이미 모든 것을 안 것이다. 그는 고개를 더욱 깊게 숙였다.
"일이 터지고 나서 알았습니다."
"그래? 그의 내력은 알고는 있는가?"
이제 더 이상 감추면 안 된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본래 문주가 되었어야 할 부문주. 갑작스럽게 전대 문주가 죽어가며 유명(遺命)으로 자신의 아들인 황임이 아니라 현 문주를 지명하는 것으로 인해 폐인이 되어 버렸다. 부친의 임종을 지킨 황임은 부친을 원망하지 않았다. 단지 그 때부터 술과 계집에 빠져 살았다. 그런 그가 안타까워서 이번 일만큼은 그의 공으로 돌리고 싶었는데 일이 이 지경 된 것이다.
"그것 역시 후에 알았습니다. 담명장군의 아들이라고…."
담명장군과 현 문주가 어떤 사이인지 아는 영목으로서는 어떠한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이 문제는 너무나 미묘해서 아무도 건들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두 알고 나서 사소한 일이라고 넘겨버렸던 자신이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
"청부자(請負者)는?"
"알 수 없었습니다. 부문주께서도 서찰과 함께 청부금만 받은 모양입니다."
이것 역시 잘못된 대답이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본문의 규칙은?"
"청부자와 그 대상을 반드시 기록해 놓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인가?"
영목은 문주가 무엇을 묻는지 알고 있었다. 단 한번 기록이 삭제되어 없어진 일이 있었다. 지금의 문주가 물었던 바로 과거의 어느 한 시기에 받았던 청부였다. 이번과 같이 아예 기록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고 분명 기재했지만 그 기록이 뜯겨져 나갔던 것이다.
남옥장군의 옥(獄)이 일어나던 홍무 26년 초에 있었던 청부. 형제 스물일곱 명이 죽고, 그 일에 직접 뛰어 들었던 문주마저 회복 불가능한 치명상을 입고 돌아와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나게 했던 그 청부를 말함이었다.
"이번 일의 생존자는?"
"조장(助長)이었던 곽흔(郭痕) 뿐입니다. 내일 정도면 본문으로 들어올 것 같습니다."
문주는 처음으로 신형을 돌려 영목을 바라보았다.
"돌아오는 즉시 데려오도록…. 다른 사람 만나는 일 없이…."
"명심하겠습니다."
영목은 머리를 바닥에 대고 조아렸다. 모든 것은 자신의 잘못이 분명했다. 형제 아홉 명을 잃었다면 목숨으로 그 죄 값을 치러야 할 일이었다. 더구나 청부는 성공하지 못했다. 청부자 역시 청부의 성공여부에 관계없이 대금을 보내왔으니 되돌려 줄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위명에 금이 가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실패했음이 오히려 다행스럽다고 생각이 드는 것은 영목뿐이 아니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