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오해할지 몰라 망설였다. 하지만 너 만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우형이 유독 너 한사람만 오늘 부른 이유도 그것이다."
대사형의 얼굴엔 어느덧 긴장감이 감돌았다. 눈빛 역시 고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운령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사형은…?"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이삼년 전까지만 해도 저들은 이 우형을 배반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거역할 생각도 가지지 않았지. 우리의 꿈이 이루어질 때 그들 역시 자신들의 꿈이 이루어지리라 생각했다. 우리는 천하를... 저들은 무림을 가질 것이란 생각 말이다."
"……!"
"누군가가 분명히 저들을 충동질했다. 그리고 저들을 충동질 할 사람은 우리 사형제 들 뿐이다."
드디어 우려하던 말이 대사형의 입에서 나왔다. 이런 말은 지금까지 생각해 본적도 없는 일이었다. 운령은 손을 올려 이마를 짚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네 말을 믿고 싶구나. 하지만 현명한 너이니 분명 올바른 판단을 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 우형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냐?"
운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대사형은 그 동안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고, 그에 따른 움직임도 감지했을 것이다. 아무리 대사형이라도 사형제 중에서 누군가가 배신했다는 말은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대사형이 왜 개봉에 있는 자신과 사형제들을 보러 왔는지도 이해되었다. 만나보지 않으면 답답했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동생들이었지만 그 중 누군가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란 생각도 처음엔 애써 부인하려 했을 것이다.
"사형…!"
"왜 운령이 담천의란 자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그 근거가 되는 정보는 무엇이었고, 그렇게 판단하도록 만든 것은 누구였을까? 왜 적절하게 그 자를 이용한다는 생각을 애초부터 버리고 그를 죽여야만 한다고 생각했을까?"
아무리 현명한 사람도 주어진 정보와 상황에 따라 최선의 방법을 선택한다. 판단이란 것은 주어진 정보와 상황에 따른 결과물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정보와 상황이라면 그렇게 판단하는 것이다.
운령은 자신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지만, 애써 변명하고 싶지만 그녀의 마음속에서 스멀거리며 피어오르는 불길함은 대사형의 말이 옳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있을 수 없는, 그리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발생했다.
"우리 열 명의 사형제 중 누구일까요?"
"모르지. 지목한다는 것 자체가 가슴 아픈 일이다. 둘째와 여덟째는 이곳에 없고, 이곳엔 너와 나를 포함해 여덟 명의 형제가 있다."
"사형!"
"찾아보자구나.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 시기를 놓치면 아무 일도 못할 테니까..."
이런 경우를 두고 진퇴양난(進退兩難)이라고 하는 것 일게다. 저들 중 주동하는 수뇌부만을 은밀하게 없애기 위해서는 그들 사형제가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사형제 중 누군가가 저들을 충동질한 자가 있다면 그들은 일을 처리하기도 전에 먼저 저들이 움직일 것이다.
저들은 구마겁을 일으킨 절대구마의 무학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결코 만만히 볼 상대는 절대 아니다. 더구나 같이 어울려 산지 십년이 되어 간다. 이런 경우에 피아(彼我)를 구분하기도 어렵다.
"슬프고 고통스런 일이군요."
"일단 스물네 개의 관을 보내거라. 그들의 문파로… 그들의 가문으로…."
천마곡을 살피러 들어왔던 스물네 명의 시신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모두 죽었고, 관을 준비했다. 헌데 그것이 그들이 소속된 곳으로 보내기 위함이었음은 운령 조차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시기가 앞당겨 질뿐이다. 지옥 같기도 했고, 고향 같기도 한 이곳이 황폐해지는 게 가슴은 아프지만 그 안에 누군가를 찾아내지 못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운령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제야 대사형의 마음을 안 것이다. 고육지책(苦肉之策)이라고는 하나 너무 위험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사형은 오랜 동안 생각해 왔던 것 같았다. 풍철한을 살려 보낸 것도 그 이유일 터였다. 상대방들이 자신들의 존재, 아니 절대구마의 후인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흘린 것도 그 이유일 터였다.
그렇다고 그녀가 지금 당장 다른 방도를 모색할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탄식을 터트렸다.
"너무나 많은 피를 흘리게 되겠군요."
"령아. 너는 선(善)이 무어고, 악(惡)이 무어라 생각하느냐? 아니 그건 너무 어렵구나. 그럼 착한 사람(善人)은 어떠한 사람이고, 나쁜 사람(惡人)은 어떠한 사람이냐?"
"……!"
운령은 대답하지 못했다. 갑작스런 물음이기도 했지만 선악(善惡)이란 것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선인이건 악인이건 역시 마찬가지다. 선악이란 기준도 절대적인 것이 아니어서 어느 정도는 상대성을 가질 터였다.
"그 질문도 어렵지? 그러면 본래부터 착한 사람이 있고, 나쁜 사람이 있을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기위해 저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운령이 알기에 대사형은 현학적인 토론을 한 적도, 하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강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고, 강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사람이었다.
"저의 생각을 물으시는 것이라면 저는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성(本性)에 대해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저 선도 악도 모르게 태어나 자라면서 선과 악으로 물들다가 선함이 많으면 선인이오, 악한 일을 많이 하면 악인 아니겠어요?"
유가(儒家)에서는 인간의 본성론(本性論)에 대해 활발한 논의와 연구가 있었다. 반드시 맹자(孟子)나 순자(荀子)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이룬 많은 학파들이 모두 인간의 본성에 기초하여 나름대로의 학설을 수립한 것이 그 좋은 예다.
"목적이 선하고 성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이루기 위해 악(堊)을 행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악(堊)을 제거하기 위해 하는 일은 모두 선(善)한 일일까? 그것 또한 업(嶪)을 쌓는 일일까?"
운령은 대사형의 마음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대사형은 번뇌하고 있는 것이다. 목적을 이루고자 뒤도 돌아다보지 않고 맹렬하게 달려 온 삶. 그리고 이제 준비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움직여야 할 시기에 그는 회의(懷疑)라는 복병을 만나고 있는지 몰랐다.
"이 우형은… 누군가가 지옥에 가야 한다면 바로 나라고 생각한다."
운령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사형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지만 모두 알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현명한 그녀라 해도 대사형의 깊은 속내만큼은 아직 알 수 없는 법이었다.
(제53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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