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말리게 산만하던 아이에게 생긴 작은 변화

부정과 미움의 언어로는 안 된다

등록 2005.07.04 00:41수정 2005.07.04 10:30
0
원고료로 응원
세상에는 확실하지 않은 것을 확실한 것처럼 믿고 있는 것이 더러 있습니다. 가령, 잠자리의 아이큐(혹은 기억력)가 8초라는 사실도 그렇습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그 말을 사실인양 떠들어댄 적이 있는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 말을 누군가로부터 들은 것 같기도 하고, 그 누군가라는 작가가 제 자신인 것 같기도 합니다.

아마도 간짓대에 앉아 있던 잠자리가 사람의 손을 피해 달아났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는 시간이 8초쯤 되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잠자리 얘기를 꺼낸 것은 제가 가르치는 학생 중에 잠자리를 닮은 아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웃으면 스르르 감기는 눈이 잠자리를 닮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녀석의 기억력이 잠자리를 빼다 박았습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간짓대에 앉아 있던 잠자리가 사람의 손에 잡힐 뻔한 것을 까마득히 잊고 제자리에 돌아오는 시간이 8초라면, 수업시간에 떠들거나 장난을 쳐서 지적을 받아놓고도 그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다시 떠들거나 장난을 치는 시간이 딱 3초입니다.

잠자리야 제 자리에 돌아와 얌전히 앉아 있을 뿐이지만, 녀석은 옆이나 앞자리에 앉은 아이를 들쑤시면서 장난을 쳐대니 수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체벌은 가급적이면 삼가고 있는 편이어서 너무 심하다 싶으면 복도에 나가 있게도 해보고 인간적으로 훈계를 해보기도 하지만 그것도 그의 짧은 기억력 안에서나 효력이 있을 뿐이니 딱 3초가 지나면 그만입니다.

야단을 쳐놓고 다시 수업을 진행하려고 하면 녀석의 눈은 이미 장난기로 인해 스르르 감겨 있기 일쑤입니다. 하루는 이렇게 인격모독에 가까운 막말을 해댄 적도 있습니다.

“유치원 학생이 유치한 것은 당연한 거야. 행동이 산만하고 유치한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거지. 문제는 네가 고등학생이면서 마치 유치원 학생처럼 행동을 한다는 거야. 사람이라면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넌 지금 고등학생의 정신연령이 아니란 말이야.”


그런 말을 할 때 그 아이의 표정은 자못 심각합니다. 혼자 불러다 놓고 할 얘기를 급우들이 있는 앞에서 했나 싶어서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도 그의 기억력 안에서 빛을 발할 뿐입니다. 길어도 잠자리 기억력의 한계인 8초를 벗어나는 법이 없습니다. 저도 지칠 만큼 지쳐 포기할 만도 한데 녀석에게는 미워할 수 없는 묘한 구석이 있어서 산만한 버릇을 꼭 잡아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 중에 우연히 산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산이라기보다는 산중턱에 있는 공원이었습니다. 저는 산에서 내려가는 중이었고 그는 공원을 향해 올라오고 있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옆에는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이 함께 있었습니다. 남학생이 여학생과 데이트를 하는 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으나 수업시간이면 불과 몇 초를 참지 못하고 산만한 행동을 일삼던 그였기에 조금은 뜻밖이었습니다.


호젓한 산책길을 여학생과 함께 걸어오는 그의 모습은 수업시간에 보던 철없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주변 풍광을 감상하는 듯 천천한 걸음으로 걸어 올라오는 젊고 어린 선남선녀의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의젓하고 성숙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어쩌면 아주 친한 사이라기보다는 이제 막 소개를 받았거나 사귀기 시작한 사이여서 점잔을 빼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그날 저를 보자 쑥스러운 표정(조금은 죄를 짓다가 들킨 듯한)을 짓던 그에게 더할 수 없는 지지와 성원의 눈빛을 보내 주었습니다. 산을 내려오면서는 그동안 그를 지도한답시고 인격 모독에 가까운 험한 말을 내뱉었던 사실을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런 말들이 그를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사실까지.

다음 날, 수업시간에 출석을 부르는데 대답하는 그의 눈빛이 여느 때와는 다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수업 중에 산만한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저와 눈이 마주치면 금방 행동을 고치곤 했습니다. 물론 잠자리의 기억력 8초의 한계를 끝내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며칠이 지나자, 그는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떠들거나 장난을 쳐도 예전처럼 크게 나무라거나 철없는 아이 취급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산 공원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에게 보여주었던 지지와 긍정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날 널 보니까 아주 의젓하더라. 너의 새로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참 기분이 좋았어. 그 여학생 너하고 잘 어울리던데 건전하게 잘 사귀어 봐.”

지금 녀석은 잠자리의 기억력을 훨씬 웃돌아 약 3분 간격으로 산만한 행동을 보이곤 합니다. 그것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3초가 3분으로 길어졌으니 무려 60배의 변화를 보인 셈이니까요. 그것도 어떤 강제나 협박에 의해서가 아닌 긍정의 눈빛 하나로 이루어진 일이니 꽤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날 이런 식으로 얘기했다면 그에게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있었을까요?

“못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는 말이 있는데 네가 딱 그거다. 공부도 못하는 주제에 무슨 연애질이냐? 그 여학생 얼굴을 예쁘장하던데 널 사귀는 걸 보니 알만하다. 야, 임마. 그런 짓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

저는 이번 일로 부정과 미움의 언어가 아닌 긍정과 사랑의 언어만이 아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AD

AD

AD

인기기사

  1. 1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2. 2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난리도 아닙니다" 농민들이 올해 벼 빨리 베는 이유
  3. 3 "대통령, 정상일까 싶다... 이런데 교회에 무슨 중립 있나" "대통령, 정상일까 싶다... 이런데 교회에 무슨 중립 있나"
  4. 4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체코 언론이 김건희 여사 보도하면서 사라진 단어 '사기꾼' '거짓말'
  5. 5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마을에서 먹을 걸 못 삽니다, '식품 사막' 아십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