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2부 106

비분강개(悲憤慷慨)

등록 2005.07.11 17:00수정 2005.07.11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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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병사 서우신을 만나 담판을 짓기 위해 서둘러 나오던 장판수는 장막 뒤에 있던 계화와 턱 하니 마주치고 말았다.

"니래 여기 무슨 일이네? 뭘 엿듣고 있었네?"


계화는 퉁명스러운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장판수를 흘겨보았다.

"엿들은 건 아니고 긴히 할 말이 있어 기회를 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긴히 할 말이라니?"
"싸움밖에 모르는 장초관께서 제 말을 듣는다고 뭘 알겠습니까? 차선달께서는 선비의 풍모가 있으니 내 말을 긴히 여기고 들어 주실 것 같아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괜스레 모가 난 계화의 말에 장판수는 화를 버럭 내었다.

"니래 하찮은 계집 주제에 궁중에서 물 좀 먹었다고 티를 내는 것이네?“

장막 바깥이 소란스러워지자 차예랑이 밖으로 나와 둘을 진정시킨 후 자초지종을 물었다. 계화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쏘아 붙였다.


"우선 아낙네들을 병영에서 내 보내겠다고 한 말은 물려주시오. 나라가 이 모양인데 아낙들을 내 보내면 어디로 가란 말이오?"
"니래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이제 몽고병들은 없으니 돌아가도 된다우."

결국 그 말 때문이었냐며 장판수의 말투가 사정조로 변했지만 내친김에 계화의 말은 계속되었다.


"조정의 대신들이 나라를 오랑캐에게 고이 들어 바쳤는데 어찌 이 병력으로 오랑캐들을 무찌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까?"

장판수는 계화가 홧김에 하는 말이라 여겨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차예랑은 달랐다.

"그게 무슨 소리냐? 궁중에서 뭔가 들은 얘기가 있느냐?"
"제 은인이었던 분이 제게 여진의 글을 가르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역적의 무리들이 그 이름을 돌리며 조정을 주름잡았는데 여기서 이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자세히 말해보라."

차예랑의 독촉에 계화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을 입증하려면 그 두루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저도 몰랐으나 거기에 여진어로 실로 엄청난 말이 적혀 있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 자들이 어떻게 하던지 청의 군대를 몰고 와 조정이 항복하게끔 만들려 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느냐? 내 겨우 두루마리에 적힌 글을 보고서는 그런 말을 하는게냐?"

"아닙니다. 남정네들이 그리도 하찮게 여기는 아녀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 얘기를 들어 보소서. 방비가 그런 데로 될 만한 강화도에서 청의 군사를 맞아 제대로 싸움이나 했는지 말입니다."

얘기를 흘려듣고 있던 장판수는 괜히 여기서 어물대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차예랑과 계화를 뒤로 하고선 서우신이 있는 막사로 달려갔다.

'저 애미나이래 느닷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기야? 전쟁 때 못 볼 것을 많이 봐서 정신이 나간 거 아닐까….'

장판수가 서우신에게 갔을 때 그는 주위에 병사하나 없는 막사 안에서 한가로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 모습이 기가 막히기도 하고 어처구니없기도 했지만 이왕 걸음을 한 김에 할 말은 해야겠기에 장판수는 서우신을 흔들어 깨웠다.

"무슨 일인가?"
"몽고놈들이 남한산성으로 한꺼번에 이동한다고 합네다. 군사들을 그쪽으로 이동시킬까 하온데…."

서우신은 뭘 새삼스럽게 그런 일을 알리냐는 눈으로 장판수를 쳐다본 후 말했다.

"뜻대로 하게. 나도 곧 뒤따름세."

대체 누가 지휘관인지도 모를 말과 행동에 장판수는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한시라도 급한 때에 어물거릴 겨를은 없었다. 장판수는 병사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이동할 채비를 하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었다. 몇몇 군관과 병사들이 영문을 몰라 장판수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몽고놈들과 남한산성에서 크게 한판 싸워보려 한다! 늦는 자는 이곳에 버려두고 갈 것이니 그리 알라!"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는 서우신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서우신은 시중을 드는 병사를 불러 자신도 전립과 전포를 갖추어 입고서는 소매 안에 숨겨져 있는 비상(독약의 일종)봉지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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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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