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2부 107

비분강개(悲憤慷慨)

등록 2005.07.12 17:05수정 2005.07.12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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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강화도에서 오랑캐들이 상륙할 곳을 알려준 이가 있었다는 것인가?"

차예량은 계화와 함께 늙은 상궁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독촉했다. 상궁은 답답하리만치 느린 말투로 대답했다.


"아… 그려… 미리 알려준 사람도 있었고 싸울 수 있었는데도 도망친 사람은 수를 샐 수 없어…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오랑캐들과 같이 죽은 사람도 있었지만 말이여… 그런데 그 자들이 내가 강화도에서 본 언문 연판장에 있던 사람들이었단 말이여."
"그러니까 그 자들이 누굽니까?"

차예량의 성급한 독촉에 늙은 상궁은 눈을 부라렸다.

"아 글쎄 자네가 누군지 알고 그런 말을 해줘…."

차예량은 지금까지의 얘기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해보았다. 계화가 보았다는 연판장은 여진어로 적혀 있었고 늙은 상궁이 보았다는 연판장은 알아보기 쉽도록 언문으로 적여 있었다고 하니, 문제의 연판장이 존재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다만 의심스러운 건 계화나 늙은 상궁 모두 문제의 연판장에 대해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조그마한 실마리조차 얘기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 건 말이지… 조정 돌아가는 꼴이 이 모양이니 병사고 뭐고 다 해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평안한 삶을 살라는 거여. 이 늙은이는 이 말만 할꺼여."


차예량은 아예 돌아 앉아 버린 늙은 상궁을 붙잡고서는 더 이상 대화를 진행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차예량은 계화를 불러내어 장소를 옮겨서는 다시 한 번 연판장의 내용을 물어보았다.

"조정대신들이 역적질을 하고 있다는 말 밖에는 드릴 수 없나이다. 그렇기에 이런 일들이 부질없게 될 것이라는 것…."


계화의 말이 끝나기 전에 차예량의 칼이 쑥 뽑히더니 계화의 목 줄기를 겨누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어서 말하라. 아니면 내 칼이 널 해치게 될 것인즉!"

보통 사람 같으면 질려버릴 일이었지만 계화는 오히려 웃음까지 보이며 차예량을 타일렀다.

"이 무슨 성마른 짓입니까? 칼을 거두시죠. 그 일이 무언지 그리도 알고 싶사옵니까? 역적모의를 한 이들의 이름을 알면 어쩌시겠습니까?"
"이는 간과할 수 없는 일이다! 당장 그 놈들을 주상전하께 아뢰어 주벌할 것이다!"
"저도 연판장을 본 후 남한산성에서 그렇게 하려 했지만 결국 이루어지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여기 와서 그 늙은 상궁의 얘기를 들으니 그때 주상전하께 말을 했다면 큰일이 날 뻔 했다는 생각도 드옵니다."

차예랑은 칼을 거두며 그 말에 대해 좀 더 상세히 말할 것을 독촉했다. 계화는 차예랑에게 다짐을 받았다.

"이 얘기는 아무에게도 해서는 안 됩니다. 황당한 말이라 해서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고 맹세해 주십시오."
"날 어찌 보고 그러느냐. 내 필시 약조를 지킬 것인 즉 어서 말이나 해 보거라."
"그렇다면 이종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사옵니까?"
"모르는 이름인데 그 자가 역적질에 관련이 있다는 것이냐?"

계화는 한숨을 쉬며 자신이 알아낸 이야기를 해주었고 말을 다 들은 차예량은 낯빛이 변했다.

"말도 되지 않는다! 게다가 물증도 없지 않느냐!"

계화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허나 전 그 말이 진실이라 여깁니다."

차예량은 잠시 안절부절 못하며 소매를 털더니 계화에게 말했다.

"약조한 데로 이 말은 아무에게도 않겠다. 허나 그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나름대로 알아볼 터인 것이니, 필요하다면 네가 날 도와야겠구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도 그 일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차예량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계화를 쳐다본 후, 휙 하니 몸을 돌려 총총히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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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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