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연정론'의 겉과 속

[정치 톺아보기 97] 노 대통령, 6월부터 '정무'에 직접 개입

등록 2005.07.15 08:30수정 2005.07.15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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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7월5일 국무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이해찬 총리·김우식 비서실장과 대화를 나누며 회의실로 입장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7월5일 국무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이해찬 총리·김우식 비서실장과 대화를 나누며 회의실로 입장하고 있다. ⓒ 청와대


노무현 대통령이 연정(聯政)을 제안하고 나선 것은 이대로 가면 오는 10월 재보선은 물론 내년의 5·30 지방선거에서도 완패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이같은 관측에 따르면 노 대통령의 연정 제안은 '지역구도 해체'라는 대의명분을 앞세우고 있지만, 그 뒤에는 내년 '지방선거 승리'라는 실리를 숨기고 있다.

노 대통령의 연정 제안이 '지역구도 해체'와 '지방선거 승리'라는 장단기 목표를 갖고 있다는 분석은 단순한 관측이 아니라 몇 가지 '팩트'(사실)와 정황증거로 뒷받침된다.

우선 노 대통령이 처음 연정 구상을 당·정·청 11인 회의에서 꺼낸 지난 6월부터 그동안 손을 놓았던 '정무'(政務)에 직접 개입하고 나선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 대통령이 이때(6월)부터 정무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팩트'를 뒷받침하는 정황증거는 적지 않다.

노 대통령 "당·정관계 검토 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하라"고 정무비서관실에 지시

지난 6월 노 대통령은 대통령비서실의 정무파트에 "당·정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 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정무파트의 한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정무비서관실에 당정관계 검토 보고서 작성을 지시한 것은 청와대에 들어온 이후 처음이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이에 앞서 6월 5일 윤태영 제1부속실장이 쓴 '국정일기'를 통해 현재의 여소야대 정국과 관련, "연정을 이야기하면 모든 국민이 '야합'이라며 기분 나빠하고, 우리와 같은 당론투표 구조하에서는 대통령이 야당 의원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정책설명을 하기도 어렵다"며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해야 하는지가 관건"이라고 밝혀 연정에 대해 지나가듯 슬쩍 '운'을 떼어 놓았다.

아울러 노 대통령은 청와대 국정상황실에는 자신의 '연정' 발언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정치이론 서적을 요약해 보고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노 대통령이 지난 7월 5일 청와대 홈페이지에 기고한 '한국정치, 정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제목의 글에서 거명한 '학자의 글'이 바로 그것이다.

청와대는 나중에 노 대통령이 거론한 '학자의 글'이 강원택 교수(숭실대 정치외교학과)의 <한국의 정치개혁과 민주주의>라고 소개했다. 대통령의 한마디로 단박에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에서 강 교수는 "1987년 이후 괄목할 만한 민주화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여전하다"면서 이에 대한 원인으로 '후진적인 정치관행과 제도'를 지적했다.


국정상황실에서는 지난 6월 하순에 강 교수의 책 가운데 '제12장 이원적 정통성과 정치안정' 부분을 요약해 '대통령과 국회, 갈등 해소방안 모색'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작성해 노 대통령에게 보고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시간에 쫓기는 대부분의 CEO(최고경영자)들이 그렇듯이, 국사에 바쁜 노 대통령 또한 그 책 전체를 읽은 것이 아니라 발췌 요약본을 읽은 것이다.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많은 신생 민주주의 국가들은 의회와 행정부라는 '이원적 정통성'으로 인해 많은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우리나라에서 분점정부가 출현하는 경우에 생겨나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의 부재이며 이로 인해 대통령의 선거공약이나 중요한 국가정책이 제대로 추진되지 못하고 표류하거나 정쟁의 대상으로 전락해 사회적 갈등을 확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강 교수의 지적은 그대로 노 대통령의 연정론을 뒷받침하는 논리가 되었다.


노 대통령 "당의 지방선거 전략에 맞춰 정책을 당에서 발표하는 방식 취하라"

노 대통령은 또 6월 27일에는 이례적으로 다른 오전 일정까지 뒤로 물리면서 '당원동지 여러분께 드리는 편지'를 써서 공개하기도 했다. 특히 노 대통령이 이 공개편지에서 당의 기강을 관리하는 강력한 권위와 권한을 가진 기관을 설치하는 방안을 건의하면서 "진지한 검토를 바란다"고 강조한 것은 더욱 더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권이 민주화되고 당의 구심이 분산될수록 당의 원칙과 규율을 강화하고 지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민주주의와 중구난방은 다른 것입니다. 당원의 자유와 자율권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원칙과 약속은 지켜져야 합니다. 최소한의 규율도 기강도 없는 당이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당 지도부와는 별개의 조직으로 당의 기강을 관리하는 강력한 권위와 권한을 가진 기관을 설치하는 방안을 건의합니다. 진지한 검토를 바랍니다."

노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정무에 '개입'한 것은 이 때부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노 대통령의 정무적 발언이 크게 증가한 데서도 알 수 있다. 특히 노 대통령은 이 때부터 전에 없이 당에 대한 배려를 강조했다.

청와대의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국정상황실에서 보고한 요약본을 토대로 정무비서관실에 "대통령과 당의 정책갈등 사례를 검토하라"고 지시를 내린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노 대통령은 이와 관련 외국에서는 당(黨)에 대한 규율과 통제가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대해 관심을 표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노 대통령은 "당·정협의와 관련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세를 낮추고 당을 존중하고 가는 수밖에 없다"면서 "청와대나 정부가 당보다 축적된 정책역량을 압도적으로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을 존중하고 가도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고 앞서의 정무파트 관계자가 전했다.

이와 함께 노 대통령은 청와대에 당을 리드하는 선도적 정책개발을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노 대통령은 구체적으로 청와대가 선도적으로 정책을 개발해 당·정 협의 때 자연스럽게 당에 '토스'해 당의 지방선거 전략에 맞춰 당에서 발표하는 방식을 취하도록 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져 주목을 끈다.

결국 이와 같은 정황증거에 비추어볼 때 노 대통령의 연정 발언은 '지역구도 해체'라는 명분 뒤에 내년 '지방선거 승리'라는 실리를 숨기고 있는 치밀하게 계산된 발언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계산은 현재 지역구도에 균열을 내놓지 못하면 내년 지방선거에서 완패할 것이 뻔하고 그리되면 2007년 대선도 어렵다는 노 대통령의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노 대통령에게 '연정'은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

노 대통령으로서는 일생의 정치목표인 지역구도 해체 명분도 세우고 지방선거 승리라는 실리도 챙길 수 있으니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이다. 그러니 노 대통령으로서는 상대방이 싫다는데도 억지로라도 받을 때까지 '연정'을 외치려는 심산이다.

청와대는 13일 발간한 '청와대브리핑'에서 "노 대통령이 이미 3년 전에 책임총리제와 연정 등 국정운영의 장기플랜을 밝혔다"고 주장했다. 노 대통령이 던진 '연정' 화두가 정치권 일각과 일부 언론이 비판하는 '느닷없다'거나 '정치적 수세를 벗어나려는 꼼수'와는 거리가 멀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청와대는 대통령 당선 뒤 10일이 지나지 않은 2002년 12월 26일, 당시 노무현 당선자가 경기도 양평에서 열린 민주당 중앙당 선대위 연수회에 참석해 밝힌 격려사의 일부를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선거제도의 확립은 꼭 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정치권에 앞으로 제안하고자 하는 준비에서 각 당이 정비가 되고 나면 공식적으로 제가 협상을 제안할 생각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2004년 총선결과, 말하자면 정당의 책임정치로 하고 대통령의 권력의 절반을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절반 이상을 줄이고 총리에게 위임하는 결단을 통해서 소위 내각제 또는 이원집중제, 분권형 대통령제 또는 내각제에 가까운 분권형 대통령제를 하겠다는 약속을 이미 한 바 있습니다만 구체적인 협상은 앞으로 해나가겠습니다. 어쨌든 지역구도 제도적으로 깨주면 대통령은 그만한 양보를 할 생각이 있다, 저는 그렇게 하면서 지역주의를 꼭 극복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문제는 노 대통령이 밝힌 '그때'가 왜 하필 지금이냐는 점이다. 청와대는 야당과 언론이 '왜 지금 이 시점에 연정문제를 제기하냐'면서 '시급한 경제문제는 방기하고 한가하게 연정이라는 정치문제나 제기한다'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 노 대통령이 해명한 것을 예로 들어 같은 글에서 "지금이 그때"라고 밝히고 있다.

"최근 연정 등과 관련된 논의는 경제와 민생이 제대로 되려면 언젠가는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하는 문제이고, 지금이 그때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사후의 자기 합리화를 위한 '결과론'이다. 왜냐하면 노 대통령은 2002년 12월 당시 연설에서 "각 당이 정비가 되고 나면 공식적으로 제가 협상을 제안할 생각"이라고 밝혔지만, 노 대통령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왜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했을까

물론 노 대통령은 그렇게 하려고는 했다. 노 대통령이 '승자'가 된 이후인 17대 국회 연설에서도 밝혔지만, 17대 총선 공약으로 이 문제를 내걸고 유권자의 심판을 받으려고 했으나 총선과 겹친 탄핵 상황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총선 이후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니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의 과반 의석 확보로 굳이 장관직을 야당과 나눌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노 대통령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최근까지 그런 제안을 할 만큼 '위기의식'을 못느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은 '왜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했을까.

그점은 노 대통령의 위기의식이 6월에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 대통령이 가슴 속에 묻어둔 '연정론'을 처음 꺼내놓은 시점은 6월 24일 총리공관에서 열린 이른바 '당·정·청 11인 회의'였다. 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정부와 여당이 비상한 사태를 맞고 있다"면서 "민주노동당이나 민주당과 연정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밝혔다.

그렇다면 지난 6월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지금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노 대통령의 위기의식을 부채질했을까.

일단, 지난 4월부터 불거진 이른바 '유전 개발' 의혹과 '행담도 개발' 의혹 그리고 부동산가격 폭등 등으로 6월 들어 대통령의 국정운영 지지도가 20%대로 하락하고 특히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이 10%대로 추락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런데도 열린우리당은 당내 내분의 증폭으로 국민들에게 구심점이 없이 표류하는 것으로 비쳐진 상황이었다.

또 노 대통령이 '당원동지 여러분께 드리는 편지'에서 당의 기강을 잡는 특별기구의 설치를 제안할 만큼 당·정·청간에 책임론도 난무했다. 특히 4·30 재보선에서 '23 대 0'으로 완패를 겪은 이후 6·3 당정 워크숍에서 반성하고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음에도 일부의 돌출적인 발언 등으로 노선 갈등이 재연되곤 했다.

당에서는 긴밀한 당정협의가 안된다는 쪽에 불만의 목소리를 높였고, 청와대와 정부에서는 당내에 구심점이 없어 '중구난방'이라고 푸념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을 추스리지 않으면 당장 10월 재보선은 물론 1년이 채 남지 않은 지방선거에서의 패배도 불을 보듯 훤했다.

바로 이런 위기상황에서 노 대통령이 그동안 손을 놓았던 '정무'에 직접 개입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노 대통령이 이때부터 정무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팩트'를 뒷받침하는 정황증거는 앞에서 적시한 바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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