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225회

등록 2005.07.20 08:05수정 2005.07.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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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모든 것이 정지할 즈음 눈에 보이는 것은 상위에 솟구친 칼날뿐이었다. 칼날은 일정 부분만 모습을 보일 뿐 더 이상 솟구쳐 오르거나 다시 사라지지 않았다. 더욱 기이한 것은 바로 그 칼날들이 일정한 글자를 형성했다는 점이었다.

완(完).


글자의 의미는 단순하고도 명쾌했다. 일이 끝났다는 것. 완전하다는 의미와 함께 끝났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 글자를 보는 두 사람의 태도는 극명하게 갈라졌다. 우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황임의 얼굴은 붉게 달아오르더니 점차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중요한 것은 글자의 위치였다. 우교에게는 바로 보이는 글자였지만 황임에게는 거꾸로 보였다. 두 사람 간의 승부는 글자가 어떻게 보이느냐로 인하여 끝이 났다. 만약 그 글자의 위치가 뒤집어져 있었다면 두 사람의 표정은 정 반대가 되었을 것이다. 천정에서 떨어진 몇 방울의 핏물이 다시 상위에 점을 찍고 있었다.

"어떻게­…?"

황임의 얼굴에는 경악과 침통함이 뒤섞여 복잡하게 변하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분명 거꾸로 보이는 것이 아닌 자신을 향해 글자가 새겨져야 당연한 일이었다.

"너는 네 부친이 가르쳐 준 가장 귀중한 교훈을 잊고 있었나 보구나."


"이럴 수는 없소. 아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오. 나는 완벽하게 준비했는데…."

"사부는 항상 일하러 떠나는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네가 완벽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라고… 그런 경우가 있다면 일을 멈추고 우선 피하라고…."


인간사에 있어서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모든 조건과 상황이 완벽하다면 그것은 누군가 다른 목적으로 그러한 상황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했다 해도 완벽하다고 느껴지면 안 된다. 주어진 조건과 상황이 완벽해진다는 의미는 자신 만이 느끼는 것이고, 다른 시각에서 보면 너무나도 허술한 불완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게 됨으로서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람은 치명적인 결과가 나온 다음에야 눈물을 흘리거나 무릎을 치면서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그제야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너무나 허술한 것이었다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이오?"

"본 문은 형제들이 목숨을 걸고 모아 온 재산을 탕진하지 않는다. 어디론가 흘러 들어갔다면 그 대가는 반드시 받아야 하지. 본 문은 그 대가로 춘야루를 가졌다."

절망적이었다. 이제야 우교가 보여주었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부친의 명으로 빼돌린 재산을 가지고 만들었던 춘야루의 모든 조직과 정보망은 이미 우교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아주 완벽하게 주위 모든 사람들을 속이고 자신 만의 세계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던 황임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언제부터였소?"

"내가 본 문의 문주가 되던 그 해부터…!"

황임은 자신이 살천문이란 조직 속에 있었지만 살천문을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백년이 넘게 존재해 온 살수조직이라면 그 잠재력은 무궁무진 할 것이다. 더구나 그런 조직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인물이 나타난다면 그 잠재력은 현실이 되어 가공할 위력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럼 나는…? 나는 허상 만 쫓던 것이었소?"

"너는 네 역할을 충분하게 해주었다."

바로 조금 전 황임이 우교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 말에 황임의 얼굴은 더욱 일그러졌다. 이곳에 배치한 인원은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수하들이었다. 아마 자신은 알아채지 못하게 자신의 측근은 고의로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천정과 바닥, 벽 틈에 은신해 있었던 자신의 측근은 마지막 승부에서 우교의 측근에게 당한 것이다. 그것으로 승부는 결정되었고, 자신은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아니 이 결과가 오기 전에 이미 승부는 나 있었을지 모른다. 상대는 이미 자신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으니까.

"크큿… 나는…."

절망감이 섞인 마른 웃음과 함께 입을 열다가 황임은 갑자기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양 어깨가 부서지는 듯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찰칵---찰칵----!

자물쇠가 잠기는 듯한 소리는 오히려 나중에 들렸다. 황임은 정신이 혼미해왔다. 기운이 쭉 빠져나갔다. 이미 자신의 어깨를 파고든 것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향(我香)… 네가…?"

아직 여물지 않은 젖가슴 위에 황임의 손은 여전히 머물고 있었지만 조금 전까지 쉴 새 없이 희롱하던 그의 손은 멈춰있었다. 아니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두 팔이 푸들푸들 떨리고 있었다. 이미 황임의 어깨 양쪽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기이한 물체가 가는 끈으로 연결된 채 걸쳐져 있었다. 한 쌍으로 이루어진 손바닥보다 작은 초승달 모양의 금빛 암기 같기도 한 그것은 살천문의 제자라면 평생토록 보지 않았으면 하는 물건이었다.

금랑혈(金狼血).

그것의 이름이었다. 살천문에서 제자를 처벌하기 전 반드시 채우는 족쇄로, 늑대의 이빨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물건이었다. 양 어깨의 쇄골을 파고 들어가 아예 상반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허리의 등뼈를 파고들어 하반신까지 마비시키는 무서운 형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황임이 억울한 것은 자신이 이개월 전부터 그리 아끼고 사랑해 주던, 그리고 조금 전까지 자신이 마음대로 온 몸을 희롱할 수 있었던 그녀가 자신의 몸에 금랑혈을 채운 장본인이었다는 점이었다. 또한 그 뒤의 그녀의 태도는 너무나 담담하여 지금껏 셀 수 없는 기녀들의 마음을 마음껏 희롱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내로서의 자부심을 한 순간에 뭉개버리고 있었다.

그녀는 황임의 품에서 빠져나와 옷깃을 여미고는 우교를 향해 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황임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은 채 조용히 물러가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은 여살수가 기녀로서 행동할 때 배우는 아주 전형적인 태도였다.

"크크큿… 아주 완벽하게 무너졌군."

황임은 몸에 가해진 고통보다 자신이 만들어 온 모든 것이 무너졌음에 더욱 큰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자조적인 비틀린 미소가 그의 입 꼬리에 달려 있었다.

"이제 말할 때가 되지 않았나?"

"이런다고 달라질 것은 없소. 나 하나 이 지경되었다고 수십 년간 준비해 온 일이 바뀌지 않는단 말이오."

"누구냐?"

"형님은 실수하고 있는 거요. 아버님의 부탁을 저버리겠소?"

"그것까지 사부가 너에게 말해주더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너를 살려준다고 했지, 너를 건들지 않겠다고 한 적은 없다."

약속이었다. 사부는 살천문의 문주 자리를 우교에게 물려주면서 황임의 목숨을 부탁했다. 그가 어떠한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반드시 살려주겠다고 약속할 것을 강요했다. 우교는 사부의 강요가 아니더라도 그 간의 정을 보아 살려주겠다고 약속했었다.

"보내주시오."

황임이 여전히 비틀린 미소를 물며 부탁했다.

"말해라."

"말할 수 없소."

우교는 고개를 저었다. 황임이 입을 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동안 우교는 황임의 배후를 캐기 위해, 자신의 사부와 연관된 자들을 캐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토록 노력했음에도 기이하게도 그 배후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아마 황임이 이번에 움직이지 않았다면 우교는 여전히 황임의 배후를 캐기 위해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었을 것이다.

우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뒷짐을 지고는 천천히 황임의 옆을 지나 루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열흘이다. 그 안에 네가 말하지 않는다면 너는 살아 있음이 차라리 죽는 것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될게다."

그 말에 황임은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교는 자신이 뱉은 말을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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