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자료사진)이종호
X파일 불똥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튀기 시작했다.
<한겨레신문>은 오늘자 1면 기사에서 도청 녹취록 일부 내용이 누락됐다고 보도했다. 97년 9월 9일자 녹취록 가운데 김대중 전 대통령과 관련된 부분이 누락됐다는 것. 홍석현씨에게 삼성의 기아자동차 인수 지원 의사를 밝히며 “당 정책위에 검토 시키겠다”고 말한 사람은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가 아니라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후보라는 것.
<한겨레신문>은 김대중 당시 후보가 “시중에서는 삼성이 큰 돈을 준다고 하는데 왜 돈이 없느냐” “김선홍이는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 “삼성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난번 KBS‧동아일보 공동 토론회 때도 삼성을 비난하지 않았다”는 말을 했는데 이 내용이 녹취록에서 누락됐으며, 그 분량은 한쪽 정도라고 보도했다.
<한겨레신문>의 이 같은 보도는 그동안 음모론을 제기했던 한나라당과 <중앙일보>에게는 반전의 계기를 부여하는 호재다. “유독 한나라당에게만 불리한 내용이 공개된 이유가 뭐냐”고 주장해온 한나라당이나 <중앙일보>로서는 “그것 봐라”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거리를 제공한 보도다.
<한겨레신문>의 보도에 따라 X파일 보도과정에 대한 재점검은 불가피해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 관련 내용 누락 사실을 계기로 X파일 파동은 보도 누락을 둘러싸고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한겨레신문>은 일단 고의적인 보도 누락가능성을 부인했다. “녹음 테이프와 요약본을 처음 입수한 MBC쪽도 김대중 후보와 연관된 대목이 빠진 요약본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애초 제보자가 외부에 유출할 때부터 이 대목이 누락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게 <한겨레신문>의 추론이다. <한겨레신문>은 이런 1차 추론을 디딤돌 삼아 2차 추론을 제시했다. “녹음 테이프를 언론에 넘긴 재미동포 박아무개씨 등이 99년 금전 거래 등을 시도했을 때 김대중 당시 대통령과 관련된 대목이 드러나는 것에 부담을 느껴 일부러 빠뜨렸거나, 안기부에서 외부로 유출되는 단계부터 빠졌을 가능성이 점쳐진다.”
<한겨레신문>의 이런 추론이 타당한지를 짚기 전에 점검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한겨레신문>이 김대중 전 대통령 관련 내용이 누락돼 있다고 보도한 문서는 ‘녹취록 요약본’이다. 즉 녹음 테이프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은 녹취록이 아니라 이를 내부 보고용으로 요약한 ‘녹취록 요약본’에서 한쪽 정도의 분량이 통째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한겨레신문>이 누락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방법이 필요하다. ‘녹취록’과 ‘녹취록 요약본’을 대조하는 방법, 그리고 ‘녹취록 요약본’ 원본과 사본을 비교하는 방법이다. <한겨레신문>은 이와 관련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기아자동차 관련 발언이 “녹음 테이프에 담겨 있었다”고 보도했다.
이 지점에서 시선은 자연스레 MBC로 향한다. MBC가 녹음 테이프를 갖고 있다는 건 공지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MBC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기아자동차 관련 발언을 특정해 보도하지 않았다. 녹음 테이프 내용을 최초 보도한 지난 22일,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정치자금이 흘러갔을 가능성을 짚는 꼭지를 별도 배치했지만 이 기사에서 기아자동차 관련 발언은 보도하지 않았다. 또 지난 25일, 기아자동차 문제와 관련한 삼성과 정치권의 결탁 사실을 파헤치는 꼭지를 내보내면서도 ‘여야 대선 후보’ ‘한 후보’ 등의 표현을 썼다.
물론 <한겨레신문>의 보도 대로 기아자동차 인수와 관련해 삼성에 힘을 실어주는 발언을 한 사람이 김대중 전 대통령만은 아니다.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도 “힘 보태겠다”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따라서 MBC가 ‘여야 대선 후보’로 묶어 보도한 게 완전히 잘못 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회창 후보 관련 부분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그 맞상대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 관련 부분을 특정해 보도하지 않은 게 형평성 차원에서 옳은 보도태도였느냐는 따져볼만한 문제다.
MBC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기아자동차 관련 발언을 특정해 보도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로 추려진다. 하나는 MBC가 녹음 테이프와 ‘녹취록 요약본’을 대조하는 과정에서 흘려 넘겼을 가능성이다. 이 경우 MBC는 ‘부실 보도’라는 오명을 안아야 하겠지만 녹음 테이프 내용의 파괴력을 적잖이 걱정해왔던 MBC가 이런 실수를 했으리라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또 하나는 ‘녹취록 요약본’ 뿐만이 아니라 녹음 테이프에서도 김대중 전 대통령 관련 부분이 삭제됐을 가능성이다. X파일을 최초로 공식 보도한 <조선일보>도 국정원 관계자의 입을 빌려 녹음 테이프가 “짜깁기됐을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하지만 MBC는 지난 22일 ‘뉴스데스크’를 통해 전문가에 의뢰한 결과 녹음 테이프가 “편집 조작된 흔적이 없다는 판정을 받아낼 수 있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아울러 녹음 테이프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발언이 삭제됐다면 관련 보도에서 ‘여야 대선후보’로 표현한 근거가 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문제가 발생하는 지점은 바로 이곳이다. MBC가 스스로 밝혔듯이 녹음 테이프가 편집 조작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누락 사실을 걸러내지 못했을까? <한겨레신문>은 MBC에 녹음 테이프를 제공한 재미동포 박모씨가 해당 부분을 도려내고 제공했을 가능성과 함께 안기부에서 유출되는 단계에서 삭제했을 가능성을 점치고 있지만 이 추론은 MBC의 “편집 조작된 흔적이 없다”는 보도를 설명하지 못한다.
‘녹취록 요약본’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관련 내용이 누락된 경위, 또 관련 보도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발언이 특정 보도되지 않은 경위를 알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MBC가 보관하고 있는 녹음 테이프를 검증하는 도리 밖에 없다. 하지만 문제의 그 녹음 테이프는 법원의 결정에 의해 공개가 금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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