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의 가을과 북녘동포의 '가난한 행복'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갑무도로'의 단풍길은 환상 그 자체

등록 2005.08.20 11:07수정 2005.08.21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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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가을과 겨울이 함께 있는 백두산 오르는 길(백두산 8부능선에 해당함).

가을과 겨울이 함께 있는 백두산 오르는 길(백두산 8부능선에 해당함). ⓒ 최성민


8월 중순이 지난 이 무렵이면 백두산 일대는 농익은 가을빛으로 물든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백두산엔 가을이 따로 없다. 9월 중순이면 벌써 삼지연 너머 저 멀리 백두봉이 흰눈을 듬뿍 뒤집어쓰고 말 그대로 백두봉이 된다. 그 백두봉을 배경삼아 삼지연 부근에 펼쳐지는 단풍과 낙엽의 잔치는 새하얀 배경이 없이 타는 단풍만 있는 남쪽의 가을에 비해 퍽이나 이색적으로 다가온다.

특히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갑무도로'의 단풍길은 환상 그 자체이다. 여기엔 순전히 이깔(잎갈)나무로만 숲이 이루어져 있는데, 낙엽송과 비슷한 이깔나무들의 낙엽이 금빛으로 물들어 바람이 불 때마다 소나기처럼 떨어져 내리는 광경은 이 길을 지나는 인간에게 자연이 특별히 마련한 선물인 것 같다. 이깔나무 이파리들이 흩날릴 때 뿌려대는 고유한 향기는 코끝을 한결 상큼하게 어루만져 준다. 티 없이 맑은 하늘 청아한 공기 속에서 그 향기와 이깔나무 낙엽의 세례를 받으며 멀리 보이는 백두봉을 향해 일직선으로 질주하는 드라이브는 이 땅에도 이런 광활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a 리명수폭포의 가을.

리명수폭포의 가을. ⓒ 최성민


백두산 여정의 '세계적인' 가을 정취는 리명수폭포에서 느껴볼 수 있다. 폭포수들이 몇 킬로에 걸쳐 이어져 있는 사이로 단풍나무와 떡갈나무 이파리들이 붉은 색 갈색 노랑색으로 물들어 폭포수의 흰 포말 사이로 떨어져 내린다. 그 모습은 단풍든 낙엽이 떨어져 내린다고 하기 보다는 하얀 폭포수 위에 또 다른 오색물감 폭포수가 하늘에서 날아와 뒤섞여 노닌다고 하는 게 더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a 리명수 폭포 왼쪽 강 풍경.

리명수 폭포 왼쪽 강 풍경. ⓒ 최성민


a 리명수폭포 오른쪽 강 풍경.

리명수폭포 오른쪽 강 풍경. ⓒ 최성민


리명수폭포는 북한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명소이다. 백두산의 눈 녹은 물이 땅속으로 수십 킬로미터를 흘러와 이곳 절벽에서 드러나 아래로 떨어지는 세계 유일의 ‘지하수폭포’이다.

이 폭포는 지하수폭포라서 그런지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 대신 지하수의 따뜻한 기운이 대기의 찬 기운과 만나 안개로 변하면서 주변 나뭇가지에 달라붙어 안개얼음꽃이 장관을 이룬다. 리명수폭포 주변은 깨끗하기 이를 데 없는 폭포수와 원시자연이 엮어내는 생명력이 온몸으로 실감할 만큼 충만하다. 폭포수가 흘러가는 강엔 팔뚝만한 고기들이 떼를 이루고 물가엔 물까마귀 등 희귀 조류들이 서성대고 있다. 강변엔 또 이름모를 야생화와 들풀들이 극히 토실하고 풍성한 식생을 이루고 있다.

a 리명수폭포 인근 마을 주택.

리명수폭포 인근 마을 주택. ⓒ 최성민


자연의 황홀함이 극치인 백두산의 가을 속에서 다람쥐와 곰, 사슴 등 야생동물들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겨울양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리명수폭포 마을 집들은 두 세 가구가 함께 사는 공동주택처럼 보였는데 흙 또는 시멘트벽에 너와지붕이 많았다. 주택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남녘의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 시골 수준과 같아 보였다. 집집마다 텔레비전 안테나를 세워둔 것도 눈에 띄었다.

주민들은 궁핍한 차림이었으나 얼굴은 가을햇살처럼 ‘가난한 행복’의 표정이었다. 티 없는 자연에 사는 것이 한 요인인 것은 분명해 보였다. 또 북녘 주민들의 흔들림 없는 표정의 다른 요인으로서 국가적인 어떤 연대감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이 기자인 나의 탐색대상이었다. 리명수폭포 맞은편 강둑에 너 댓 명의 아이들이 이쪽을 구경하고 있다가 내가 400mm 망원렌즈를 꺼내는 순간 사라졌다. 안내원은 “아이들이 미처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물건에 놀랐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망원렌즈를 미제의 박격포로 오인한 것 같다”는 농담 섞인 설명을 덧붙였다.


a 백두밀영 순례 길에 유희를 벌이고 있는 북녘 여핵생들.

백두밀영 순례 길에 유희를 벌이고 있는 북녘 여핵생들. ⓒ 최성민


북녘 사회를 들여다보면 크게 상반된 두 양상이 공존하고 있다. 식량난 속에서도 공공건물이나 조형물을 지었다 하면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 대동강가 주체사상탑(높이 175m)의 위용은 '위대한 조선'을 웅변한다. 63빌딩의 2배 높이에 이르는 '106호텔'도 완공단계에 이르렀다.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고 미국과 일본 코앞에 대륙간탄도탄을 날릴 수 있는 실력이나, 초대소 일회용 칫솔은 한 번 치아에 문지르면 털이 다 빠진다. 일회용 면도기는 수염을 뽑아내는 수준이고 형광등은 5분쯤 뒤에 불이 들어오거나 기별이 없다. 못 먹어서 비실거려야 할 사람들이 곡예 부리기는 신기에 가깝고 소년학생궁전 아이들 공연은 넋을 잃게 한다. 구호를 외칠 때는 피목소리를 토해내는 사람들이 <우리의 소원>이나 <다시 만나요>를 부를 때는 눈물이 글썽글썽한다.

a 삼지연읍 소년학생예술궁전에서 공연한 어린 학생들이 무대에서 남녘 관광객들과 어울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삼지연읍 소년학생예술궁전에서 공연한 어린 학생들이 무대에서 남녘 관광객들과 어울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최성민


현지에서 보기에 이 극단적인 두 흐름 사이에는 그것을 이어주는 강고한 맥이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전쟁위협으로부터의 공포'와 '지도자에 대한 존경과 국가에 대한 충성'으로 파악된다. 북녘 사람들의 처지에서 보면, 6.25 전쟁의 쑥대밭에서 '김일성 수령의 지도 아래' 자력으로 이만큼 국가를 건설했다. 의식주와 직장을 국가에서 다 대준다. 유치원부터 고등중학교까지(11년) 의무교육이다. 대학도 일단 들어만 가면 학비는 국가부담이다. 미국이 경제봉쇄로 사방을 막고 전쟁연습으로 옥죄고 있는 상황을 감안해 대학 대신 나라를 위해 군에 가기도 한다. '미제'가 밉지 남녘 동포들은 한 많은 우리 핏줄이다.


평양 처녀가 시골 상이군인에게 시집가고,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온 여성이 압록강변 초소병과 결혼해 '혁명사적지' 평생강사를 자원해 간다. 이런 삶이다 보니 진지하고 정중하고 조신한 태도가 몸에 밴다. "미군이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 궁핍하지만 국가와 민족을 위해 혼을 바치자." 그 혼을 한데 모아 주체탑의 위용으로, 소년학생궁전의 우렁찬 공연 등으로 표출한다.

a 가을빛 갑무도로. 달리는 기분이 '상쾌함' 그 자체이다.

가을빛 갑무도로. 달리는 기분이 '상쾌함' 그 자체이다. ⓒ 최성민


방북 셋째 날 북쪽 김영성 민화협 부위원장(당시)은 아침식사 자리에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북녘 동포들의 실정을 설명해 주위를 숙연케 했다. "우리 인민이 화려한 옷은 못 입었지만 긍지를 갖고 있습니다. 95~96년 굶는 상황에서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라는 말이 인민구호 속에서 나왔습니다. 폭 200m의 남포고속도로를 청년들이 100릿길 마대자루를 메고 달려서 만들고 있습니다.

a 북녘의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며 감회에 젖은 김영성 위원장.

북녘의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며 감회에 젖은 김영성 위원장. ⓒ 최성민

'선군정치'를 군국주의라고 비난하는 것은 어려운 때 자기 나라 버리고 간 사람들이 하는 소리입니다. 수령님 잃고 먹을 것 없고 제국주의자들이 덤벼드는데 선군정치 안 합니까? 아이들이 아버지 잃고 왕왕 울 때 돌멩이 쥐고 때려죽이겠다고 달려드는데 그 자식들 생각이 어떻겠습니까. 그 얘기 하려면 눈물나서 못하겠습니다. 수령 잃고 눈물바다가 되었는데 강제로 내몰았다고 했습니다. 강제로 눈물 흘릴 수 있습니까? 그렇게 믿고 있던 아버지 같은 분이 돌아가셨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습니까?

94년 미 국무성 외교안보팀이 조선전쟁 가상연구를 했습니다. 800억 달러가 든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그 돈 들여 전쟁을 해봤자 자기쪽도 코피를 흘릴 것이다. 자기쪽이 하나 칠 때 저쪽도 미 본토를 친다. 초전에 40만이 죽는다는 계산이 나왔답니다. 이래서 미국이 초긴장상태로 몰고 갔다가 물러났습니다. 인민들 삶의 질은 높지 않지만 이견 없이 우리 당을 따라갑니다. 물물교환 기반의 사회주의경제가 오므라들어 어려움을 겪는 건 사실이지요. 하루아침에 변화되니까 진통 안 겪겠습니까? 진통이 크면 옥동자를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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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창간발의인, 문화부 기자, 여론매체부장, 논설위원 역임. 곡성 산절로야생다원 대표.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 소장. 철학박사(서울대 교육학과,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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