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약산의 육필 붓글씨. "신국가는 신청년이 건립할 것이요 신청년은 신사상이 확구한 자를 의미함"이라고 썼다.실천문학사
김원봉은 남과 북, 모두에서 잊혀진 인물이다. 1905년 을사조약 때도, 1910년 강제 합병 때도 눈물을 흘렸다는 표충비(사명대사의 공적을 기록한 비)와 표충사(승병장 사명대사를 모신 절)의 고장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김원봉은 약관의 나이에 의열단을 조직, 해체되기까지의 10여 년간 단장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의열단 투쟁을 진두지휘했고, 조선인 조직으로는 처음으로 중국국민당 정부로부터 항일무장세력으로 인정받고 지원을 받은 부대였던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여 대장을 지냈고, 한국광복군 부사령관, 임시정부 군무부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독립국가 건설을 위하여 이념적 지향을 초월하여 좌우익이 합작할 것을 역설한 여운형처럼 남에서도, 북에서도 끝내 발붙이지 못하고 사라져간 비운의 혁명가이다.
"일신의 위험을 피해 월북,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하고 국가 검열상, 노동상 등 고위직을 지냈지만 끝내 숙청된 북에서의 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김일성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냈다는 이유로 남에서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금기시 되었습니다."
그를 독립운동가로 존경하고 흠모하다 결혼한 부인 박차정이 '근우회' 활동과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을 맡아 투신한 공을 인정받아 1995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은 것과 대조적으로 그는 지난 5월 마지막 남은 그의 막내 여동생 김학봉씨가 건국훈장을 신청했지만 북한에서 '상'급 이상의 고위직을 지낸 이에게는 서훈하지 않는다는 현행의 규정 때문에 좋은 결과는 기대하지 않는 눈치다.
"그나마 지난 2월 KBS의 '인물현대사'라는 프로그램이 3·1절 특집으로 '조국의 이름으로 응징하라-의열단 김원봉'을 방영하여 독립운동의 또 다른 물줄기를 만들어낸 약산을 일반인에게 알린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잊혀진 '그들'에 대한 예의
| | | 작가 이원규는 누구인가 | | | | 1947년 인천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한 이원규는 고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1984년 단편소설 '겨울무지개'가 <월간 문학> 신인상에 당선되고, 1986년 <현대문학> 창간 30주년 기념 장편공모에 <훈장과 굴레>가 당선되어 문단의 말석에 명함을 디밀었다.
그가 1990년에 발표한 박영준문학상을 받은 장편 <황해>는 일제시대부터 6·25에 이르는 현대사를 시간적 배경으로, 덕적도와 인천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여 이념의 질곡을 헤매는 민족적 비극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한때 운동권의 학습서(?)로 꼽히기도 했다.
1995년 독립전쟁 현장 답사기를 <스포츠서울>에 연재하였고, 9권짜리 대하소설 <누가 이 땅에 사람이 없다 하랴>를 썼고, 역사기행서 <독립전쟁이 사라진다>(전2권)를 출간하는 등 독립운동답사 전문가로 활동한다.
1999년부터 모교인 동국대 겸임교수로 창작실기를 가르치고 있는 이원규는 2001년 <대한매일>에 연재했던 해외항일 전적지 탐방기인 <저기 용감한 조선 군인들이 있었소>(공저)를 냈고, <펠리컨의 날개> 등 지금까지 4권의 창작집을 냈다. / 조성일 기자 | | | | |
<약산 김원봉>에는 김원봉 한 사람의 삶과 투쟁에 국한되지 않고 무수히 많은 실존 이름이 등장한다.
김약산의 요청을 받고 의열단선언을 써준 단재를 비롯 그를 라이벌로 인식하면서 임정을 이끌어간 백범, 남경 금릉대학 선배로서 그를 지켜보며 격려해주던 몽양, 그의 처재당숙이자 북한 부수상을 지낸 김두봉, 공산주의 독립전쟁 영웅인 김무정과 최용건, 그리고 그의 명령을 받고 초개같이 일신을 조국에 바친 의열단원 윤세주, 이종암, 박재혁, 김익상, 나석주….
"김약산의 삶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많은 사람들을 등장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역사에 대한 양심과 다짐 때문이었습니다. 중국과 수교도 안 되던 시절 외국인이 들어갈 수 없는 미개방지역까지 잠입했던 첫 답사부터 열서너 차례 현지답사를 하면서 저는 늘 현장에 서서 거기서 싸운 선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꼽으며 그들을 기억하리라 다짐했었거든요. 그러니 이 책을 쓰면서 그들의 이름을 어찌 등장시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그가 그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누가 부르랴 싶어 차마 빼지 못하고 많은 인물들을 이 책에 등장시켰다고 했다. 수많은 그들에 대한 예의를 차린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김약산의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지워져 안타깝다고 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뒷날 중국공산당의 무장세력인 홍군과 연합해 일본군과 싸우다가 쓰러지거나 광복 후 북한으로 귀국하였기 때문이다.
이원규는 우리가 그동안 접하지 않았던 새로운 인물도 발굴하여 등장시킨다. 김약산과의 평생 친구인 김훈이 대표적인 인물. 김훈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역사에서 묻혀있는 인물이라며 이원규는 그가 독일과 소련 유학을 마치고 중국 홍군의 대장정을 지휘하다 전사한 '양림'이 바로 김훈이라고 했다.
아마도 약산은 성품으로 보아 자결했을 것
▲오마이뉴스 남소연
이원규는 이 책을 쓰면서 못내 아쉬웠던 점은 김약산이 북한으로 간 뒤의 행적에 대한 정보를 많이 얻지 못했던 것이라고 했다.
그가 가장 존경하던 여운형의 암살로 인한 상실감과 일제 때 고등계 형사였던 노덕술에게 뺨을 얻어맞고 분해 북으로 갔던 김약산은 중국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싸웠던 김두봉, 최창익 등 그의 옛 조선의용대 동지들은 연안파라고 불리며 강한 세력을 형성하나 김일성 제거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대거 숙청당할 때도 살아남았다고 한다.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한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때 축사를 하고 사회를 보기도 했던 그는 월북 인사들의 주장을 변호하여 한반도 중립화를 지지하다가 결국 실각하고 만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확인할 자료를 구하지 못해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아마도 그의 성품으로 보아 결국 자살하지 않았겠느냐고 이원규는 말했다.
"지독한 공산주의자였으면서도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땅에서 처형당한 박헌영, 종파투쟁을 방관했다 하여 제거당한 김두봉과 나눴던 대화를 생각하던 김약산은 자신이 남과 북이 어디에도 설 수 없는 중간자라는 생각에서 청산가리를 입에 털어 넣고 자살하는 것으로 그렸습니다. 그래서 언제고 정확한 자료가 나오면 다시 고쳐 쓸 작정입니다."
시대와 역사에 대한 작가의 책임을 의식하며 약산의 숨결이 남은 현장을 빠짐없이 답사하면서 이원규가 내린 약산의 삶은 민족을 위해서라면 어디서 일하든 무슨 상관이냐며, 남에서 안 되니까 북으로 간 것이지, 약산은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원규는 <장자>의 '추수'편에 나오는 말로 약산의 삶을 응축해 표현했다.
"허연 칼날이 눈앞에서 교차해도, 죽음을 삶처럼 보는 것이 열사의 용기라네!"
| | 약산 김원봉의 연보 | | | | - 1898년 경남 밀양 출생 - 1911년 일장기를 변소에 버린 사건으로 밀양공립보통학교 자퇴하고 동화학교로 전학 - 1912년 표충사에서 수도하면서 독학 - 1913년 서울 중앙학교 편입학 - 1916년 중국 천진 덕화학당 입학 - 1918년 남경 금릉대학 입학 - 1919년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 입학했다가 자퇴하고 길림에서 의열단 창단 - 1923년 단재에게 ‘조선혁명선언’ 집필 부탁 - 1926년 의열단원 나석주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 투척 - 1927년 중국공산당 남창 봉기 참가 - 1931년 박차정과 결혼 - 1938년 조선의용대 창설하고 대장에 취임 - 1942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으로 개편 - 1944년 임시정부 군무부장 취임, 아내 박차정 사망 - 1945년 최동선과 재혼, 건준 임시내각 군사부장 취임 - 1947년 수도경찰청 수사국장 노덕술에게 체포 - 1948년 월북, 남북연석회의 축사 및 사회, 국가검열상 취임 - 1952년 노동상 취임 - 1958년 회갑을 맞아 훈장을 받고, 10월에 숙청 | | | | |
약산 김원봉
이원규 지음,
실천문학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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