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밀밭 사이로 나타난 해바라기 꽃밭이 눈을 즐겁게 한다. 카리온에서 레디고스 가는 길.김남희
가는 것만이 아름답다
한 군데서
몇 군데서 살기에는
너무 큰 세상
해질녘까지
가고 가거라
그대 단짝
느린 그림자와 함께
흐린 날이면
그것 없어도
그냥 가거라
그대순례 / 고은
2005년 7월 14일 목요일 맑음. 오늘 기온 40도
오늘 쓴 돈 : 숙박 5 + 저녁 3.3 +음료 1.1 = 9.4유로
오늘 걸은 길 : 카리온(Carrion) - 레디고스(Ledigos) 23.5km
오늘도 언제나처럼 5시에 눈을 뜬다. 이제는 자명종 없이도 5시만 되면 눈이 떠진다. 어제 사놓은 빵과 과일로 아침을 먹고 숙소를 나선다.
오늘은 옥수수밭 사이로 이어지는 오솔길이다. 아침부터 때 아닌 복병을 만났다. 피 맛을 못 본 지 사흘은 됐는지 매섭게 얼굴로 달려드는 모기떼들. 산티아고로 보낸 짐 속에 들어 있던 모기 쫒는 약이 아쉽다.
해가 떠오르자마자 더위가 온 몸으로 달라붙기 시작한다. 모기와 더위에 지친 나는 닐스크리스티안과 이야기를 나눌 기운도 없어서 뒤에서 혼자 걷는다.
걷기 시작한 지 네 시간 만에 칼자디야 데 라 쿠에자(Calzadilla de la Cueza)에 들어선다. 수영장이 딸린 이곳 알베르게에서 쉬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30분 쉬고 다시 걷는다.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닐스크리스티안이 내게 말한다.
"오전에 네 웃음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라며 웃는 그. 그에겐 미안하지만 이제 난 혼자가 되고 싶어진다.
12시. 레디고스(Ledigos) 도착.
지친 우리는 예정과 달리 이곳에서 쉬기로 하고 짐을 푼다. 씻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워 1시부터 6시까지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걸을 땐 괜찮던 닐스크리스티안은 지금 일사병에 걸려 화장실을 오가며 토하고 있다.
요리할 기운도 없어 마른 빵과 과일로 배를 채우고 있었더니 그동안 낯을 익힌 이탈리아인 아줌마 나디아가 파스타를 한 그릇 덜어준다. 과일로 답례하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드러눕는다.
아, 오늘 밤은 코골이의 초절정 고수가 내 옆에서 잔다 해도 죽은 듯 잘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