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야, 열차야, 나를 실어 가다오"

[산티아고 일기 10] 홀로 걷는 길, 벗들이 있어 즐겁다

등록 2005.08.31 09:57수정 2005.09.05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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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밀밭 사이로 나타난 해바라기 꽃밭이 눈을 즐겁게 한다. 카리온에서 레디고스 가는 길.
끝없는 밀밭 사이로 나타난 해바라기 꽃밭이 눈을 즐겁게 한다. 카리온에서 레디고스 가는 길.김남희

가는 것만이 아름답다
한 군데서
몇 군데서 살기에는
너무 큰 세상
해질녘까지
가고 가거라
그대 단짝
느린 그림자와 함께
흐린 날이면
그것 없어도
그냥 가거라

그대순례 / 고은



2005년 7월 14일 목요일 맑음. 오늘 기온 40도
오늘 쓴 돈 : 숙박 5 + 저녁 3.3 +음료 1.1 = 9.4유로
오늘 걸은 길 : 카리온(Carrion) - 레디고스(Ledigos) 23.5km


오늘도 언제나처럼 5시에 눈을 뜬다. 이제는 자명종 없이도 5시만 되면 눈이 떠진다. 어제 사놓은 빵과 과일로 아침을 먹고 숙소를 나선다.

오늘은 옥수수밭 사이로 이어지는 오솔길이다. 아침부터 때 아닌 복병을 만났다. 피 맛을 못 본 지 사흘은 됐는지 매섭게 얼굴로 달려드는 모기떼들. 산티아고로 보낸 짐 속에 들어 있던 모기 쫒는 약이 아쉽다.

해가 떠오르자마자 더위가 온 몸으로 달라붙기 시작한다. 모기와 더위에 지친 나는 닐스크리스티안과 이야기를 나눌 기운도 없어서 뒤에서 혼자 걷는다.

걷기 시작한 지 네 시간 만에 칼자디야 데 라 쿠에자(Calzadilla de la Cueza)에 들어선다. 수영장이 딸린 이곳 알베르게에서 쉬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30분 쉬고 다시 걷는다.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닐스크리스티안이 내게 말한다.


"오전에 네 웃음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라며 웃는 그. 그에겐 미안하지만 이제 난 혼자가 되고 싶어진다.

12시. 레디고스(Ledigos) 도착.


지친 우리는 예정과 달리 이곳에서 쉬기로 하고 짐을 푼다. 씻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워 1시부터 6시까지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걸을 땐 괜찮던 닐스크리스티안은 지금 일사병에 걸려 화장실을 오가며 토하고 있다.

요리할 기운도 없어 마른 빵과 과일로 배를 채우고 있었더니 그동안 낯을 익힌 이탈리아인 아줌마 나디아가 파스타를 한 그릇 덜어준다. 과일로 답례하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드러눕는다.

아, 오늘 밤은 코골이의 초절정 고수가 내 옆에서 잔다 해도 죽은 듯 잘 수 있을 것만 같다.

성 야곱 조각 앞에서 웃고 있는 이탈리아인 나디아 아줌마. 나를 볼 때면 늘 꼭 껴안고자 키스를 퍼부으며 반가워하곤 했다. 사하군 알베르게 앞.
성 야곱 조각 앞에서 웃고 있는 이탈리아인 나디아 아줌마. 나를 볼 때면 늘 꼭 껴안고자 키스를 퍼부으며 반가워하곤 했다. 사하군 알베르게 앞.김남희

2005년 7월 15일 금요일 맑음
오늘 쓴 돈 : 아침 3 + 숙박 4 + 장 본 비용 8 + 빵 1.5 = 16.5유로
오늘 걸은 길 : 레디고스(Ledigos) - 사하군(Sahagun) 16.5km


아침에 닐스크리스티안에게 말했다. 그것도 냉정할 정도로 단호한 어투로. "오늘은 혼자 걷고 싶어"라고. 잠에서 덜 깬, 일사병에서 겨우 회복된 그에게!

편지를 남기고 떠나려 했는데 침대에 쪽지를 놓는 순간 그가 깨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말을 해야 했다.

저녁에 만날 숙소를 정하고 혼자 돌아서 나오는데 발이 무겁다. 나는 왜 이렇게 까다로운 걸까? 같이 좀 걸으면 어때서 굳이 혼자 걷겠다고 그런 말을 해야만 했던 걸까. 하지만 아침부터 오후까지 종일을 누군가와 함께 걷는 건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래된 교회와 로마시대에 지어진 다리. 사하군 가는 길.
오래된 교회와 로마시대에 지어진 다리. 사하군 가는 길.김남희
불편한 마음을 끌고 걷는 길. 어둡던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신선한 새벽 공기의 흐름을 느끼며 침묵 속에서 혼자 걷는 행복이 조금씩 차오른다.

이른 새벽, 아직 세상의 살아있는 것들이 깨어나기 전인 이 아침의 고요가 내게는 축복 같은 시간이다. 그 축복은 침묵 속에서 완전해지기에 때로는 혼자일 필요가 있는 게 아닐까.

첫 마을에서 아침을 먹고 다시 걷는다. 날은 벌써 더워지고 있다.

누군가 길가의 담벼락에 남겨놓은 낙서가 눈에 들어온다.

"For what shall it profit a man, if he shall gain the whole world and lose his own soul?(사람이 온 세계를 얻고도 자신의 영혼을 잃는다면 도대체 무슨 이익이 있을까?)"

만약 누군가 자신의 영혼을 얻기 위해 온 세계를 잃어야 한다면? 그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사하군(Sahagun). 길가의 알베르게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하고 배낭을 내려놓는다.

한글이 가능한 인터넷을 보는 순간 생각도 없이 그냥 짐을 풀어버렸다. 장을 봐서 샐러드로 점심을 만들어 먹고 쉬는 지금. 계속 닐스크리스티안이 마음에 걸린다.

중세를 무대로 한 연극을 공연하는 날. 사하군
중세를 무대로 한 연극을 공연하는 날. 사하군김남희
출연진은 물론 마을 사람들까지 중세 시대의 의상으로 분장하고 광장으로 향하고 있다.
출연진은 물론 마을 사람들까지 중세 시대의 의상으로 분장하고 광장으로 향하고 있다.김남희




2005년 7월 16일 토요일 맑음
오늘 쓴 돈 : 과일 0.39 + 숙박 4 + 인터넷 0.5 + 물 등 1.2 = 6.09유로
오늘 걸은 길 : 사하군(Sahagun) - 만시야(Mansilla) 38km


5시에 일어나 샐러드로 아침을 먹고 5시 30분에 숙소를 나선다. 시내를 빠져나오니 길은 곧게 뻗은 외줄기. 도로를 5m쯤 옆으로 두고 걷는 길. 어둠 속에 혼자 걸을 땐 늘 두려움이 앞선다.

6시 40분. 칼자다 델 코토(Calzada del Coto)에서 갈림길이 나왔다. '오리지널 루트'라는 'Camino Franceis'로 들어선다. 도로 옆 의자에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쉰다. 곧 해가 뜨려고 동편 하늘이 온통 붉은 기운이다. 오늘은 어제 쉰 대가로 38km를 가야한다.

8시. 베르시아노스(Bercianos) 도착.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단 한 명의 순례자도 볼 수 없어 혼자 노래를 부르며 걷는다. 오늘의 주제는 "다시 부르는 민중가요" 대학 시절에 즐겨 부르던 노래들을 불러본다.

불행히도 내 탁월한 기억력 덕에 가사가 끝까지 기억나는 노래라고는 '전대협 진군가'와 '광야에서' '꽃다지'뿐이다. 꽃다지를 부르고 있자니 가사가 어쩌면 이렇게 요즘의 내 심정 같은지!

"그리워도 뒤돌아보지 말자. 작업장 언덕길에 핀 꽃다지. 나 오늘밤 캄캄한 창살 안에 몸 뒤척일 힘조차 없어라. 진정 그리움이 무언지 사랑이 무언지 알 수 없어도 퀭한 눈 올려다본 흐린 천정에 흔들려 다시 피는 언덕길 꽃다지."

옛 노래들을 부르며 걷자니 지나가버린 시절, 지나가버린 사람들이 떠오른다. 흘러가버린 그 시절, 나의 20대. 많이 사랑했고, 사랑했던 만큼 분노하고, 희망만큼 좌절도 컸던 시기. 치열하게 살고 싶었지만 어떤 삶이 잘 사는 삶인지 몰라 늘 곁눈질을 해야만 했던 시기. 그 빛나면서도 어두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걷는 길.

어느 집 앞에 활짝 핀 수국이 탐스럽다.
어느 집 앞에 활짝 핀 수국이 탐스럽다.김남희
긴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누군가 내게 보내온 편지에서 말했다.

"자꾸 뒤돌아보지는 마. 한 번 길을 나섰으면 그냥 앞만 보고 가."

그때는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남겨두고 온 것들을 그리워하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곤 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뒤돌아보는 나를 허용한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가끔은 뒤를 돌아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껏 걸어온 길이 나를 이루어 왔으므로.

9시 40분. 부르고 라네로(Bur해 Ranero) 도착. 이제 꼭 절반 남았다. 복숭아 두 알 먹고 다시 걷는다.

아! 메세타(Meseta).
정말 메마르고 건조한 땅.
불타는 광야와 그늘도 없이 이어지는 밀밭길.
예수가 40일간 헤매며 기도했다는 광야가 이런 곳이 아니었을까.
가도 가도 끝없는 밀밭뿐.
이제 밀밭은 더 이상 내게 아무런 울림도 주지 않는다.
그저 빨리 이 밀밭을 벗어나고 싶을 뿐.

문득 성 프랜시스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성 프랜시스가 겨울에 편도나무를 깊이 들여다보며 나무를 향해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 나무가 갑자기 만발한 꽃으로 덮였다고 한다.

나도 사람들이 내게 산티아고에 관해 이야기해 달라고 할 때 내 얼굴이 미소로 덮이고 내가 환한 꽃으로 피어나는 그런 경험을 꿈꾸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내 앞에 펼쳐진 밀밭이 일제히 꽃을 피워낸다 해도 놀라움으로 들여다 볼 여유조차 없이 그저 걷고만 있을 뿐이다. 나만 홀로 어떤 낯선 시간, 낯선 공간 속에 떨어져있다는 격절(隔絶)의 느낌 속에서.

산티아고를 걷다가 사망한 순례자의 무덤. 순례자들은 길을 가다가 이런 무덤을 만나면 추모의 표시로 돌 하나를 올려놓거나 들꽃을 꺾어 놓곤 한다.
산티아고를 걷다가 사망한 순례자의 무덤. 순례자들은 길을 가다가 이런 무덤을 만나면 추모의 표시로 돌 하나를 올려놓거나 들꽃을 꺾어 놓곤 한다.김남희
12시. 빌라마르코(Villamarco) 도착.

렐리오고스(Reliogos) 거쳐서 다음 마을이 오늘의 목적지 만시야(Mansilla)이다. 이제 3분의 2를 왔고, 12km 정도 남은 것 같다.

어깨가 부서져 내릴 것 같고, 다리의 근육이 너무나 당긴다.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이 땡볕 아래 걷고 있는 건지 잠시 회의가 인다.

지친 몸으로 겨우 발을 옮기는 내 곁으로 열차도 지나가고, 초경량 비행기도 지나간다. 나도 좀 실어갔으면….

"열차야, 나를 너와 함께 데려가 다오!
배야, 나를 여기서 몰래 빼내다오!
나를 멀리, 멀리 데려가 다오.
이곳의 진흙은 우리 눈물로 만들어졌구나!"

보들레르의 시가 생각나는 길.

어느 순간 길가 플라타너스 나무의 크기가 확 줄었다.
이제는 조금의 그늘도 없다.
온 몸은 땀에 흠뻑 젖었다.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쉬고 있는 순례자들.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쉬고 있는 순례자들.김남희

3시. 마침내 만시야 도착.

먼저 와 있던 닐스크리스티안과 독일인 토마스가 반갑게 맞아주며 발을 마사지해준다. 그리고 배고프다는 나를 위해 덴마크 소녀 크리스티나가 파스타를 만들어준다. 벗들의 따뜻한 마음이 내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점심을 먹은 후 다들 모여서 노래를 부르며 놀았다. 스페인 친구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의해 나도 한국노래를 불러야만 했다. 결국 아침에 불렀던 '꽃다지'를 불렀다. 다행인 건 한 곡 부르고 나니 다시는 요청을 안 하네.

오늘 같은 방을 나눠 쓰는 이들은 스페인 처녀 로사와 헝가리인 처녀들 레나타와 비라그. 레나타는 놀랍게도 88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를 기억해 "호도리"라고 뚜렷하게 발음한다. 아직도 집에 그 인형이 있다면서. 게다가 올림픽 주제가였던 '손에 손 잡고'도 기억해내 영어로 흥얼거린다. 잊고 있었던 그 오래된 노래를 이 먼 곳에서, 그것도 헝가리인 친구들을 통해 듣고 있자니 기분이 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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