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2부 135

가야 하는 길, 와야 하는 곳

등록 2005.09.06 17:05수정 2005.09.06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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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이름을 결코 밝히지는 않았고, 자신의 성이 김가라는 것만 말했다. 그는 상당히 명망 있는 집안의 종손이었으며 40년 전에는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진사시까지 입격한 나라의 재원이기도 했다. 그러한 그가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골목의 술집을 전전하며 한량 짓을 한 적이 있었다.

모두 일곱 명인 자신들을 스스로 왈자칠현(曰子七賢)이라고 칭했던 이들은 해가 질 무렵이면 해괴하고도 무모한 장난질에 탐닉하곤 했다. 남의 집 멀쩡한 된장독에 똥을 채워 넣거나 귀신행세를 하며 괴성을 질러 사람들을 놀래키는 일은 보통이었고, 술기운을 빌어 길가는 아녀자를 희롱하거나 순라꾼을 기습하여 옷을 벗기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스스럼없이 친구들과 이런 행동을 해오던 김가는 점점 그러한 장난질에 싫증과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어느 날, 매번 벌어지는 또 한 차례의 거나한 술자리 후 이들은 장난거리를 찾아 밤거리를 쏘다니기 시작했다.

"저기 처자를 보오. 등을 든 시비(侍婢 : 시중을 드는 노비)도 없이 장옷도 제대로 안 쓰고 인적 없는 이 길을 따라 어딜 저리 바삐 갈꼬?"

체격이 장대한 허가가 낄낄거리며 드디어 그날 하루 장난거리가 될 상대를 찾아내었다. 왈자칠현들은 더 이상 논의가 필요 없이 처녀를 둘러싸고 앞길을 막았다.

"누구요?"

처녀는 약간 겁을 먹은 눈치였지만 말투에 기품이 넘쳐흘렀다. 마르고 입심 좋은 박가가 나서 처녀에게 희롱의 말을 던졌다.


"아리따운 처자가 이 밤중에 몰래 어디 갔다 오시오? 떡대 좋은 종놈이랑 눈이라도 맞은 것이외까?"

왈자칠현들은 몸을 뒤흔들며 웃어 재꼈고 저질스러운 언사에 처녀는 눈을 잔뜩 치켜들며 박가를 노려보았다.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일을 옆에 있던 허가가 더욱 저질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처녀의 심기를 자극했다.


"그깟 종놈의 허리 쟁기질보다 선비의 섬세한 붓놀림이 더 애틋한 법이니 나와 같이 날이 새도록 어울렁 더울렁 놀아봅시다 그려!"

그러더니 술기운에 대뜸 처녀의 손을 잡으려 했는데 그에 앞서 처녀의 손이 매섭게 허가의 뺨을 후려갈겼다.

"이게 무슨 짓들이냐!"

뺨을 맞은 허가는 당혹스럽게 얼굴을 만지며 서 있었고 그 모양새를 본 나머지 여섯 명은 더욱 크게 웃어 버렸다. 망신을 당한 허가는 몹시 화를 내며 처녀를 힘껏 밀어버렸고 처녀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어디 이래도 내가 그렇게 당당하게 굴 수 있는지 보자!"

허가는 처녀의 옷을 잡아 찢기 시작했고 다른 이들은 그저 이를 바라보며 웃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김가는 허가의 행위가 너무나 도를 넘어섰음을 보고서는 이를 말리기 시작했다.

"이보게 이게 무슨 짓인가?"

주사가 심했던 허가는 김가의 만류 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거세게 저항하는 처녀의 목을 조르려고까지 했다. 보다 못한 김가는 힘껏 주먹을 날렸다. 졸지에 한대 얻어맞은 허가는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김가를 보더니 벽력같은 괴성과 함께 얼굴을 후려치고 발길질을 해대었다.

"네 놈이 감히 날쳐? 어디 혼 좀 나 봐라!"

김가는 덩치 크고 힘센 허가의 상대가 아니었지만 얻어맞으면서도 허가의 허리를 잡고 처녀에게서 멀리 떨어지도록 밀어 내었다. 일이 심상치 않음을 뒤늦게 깨달은 친구들이 웃음을 거두고 허둥지둥 싸움을 뜯어 말렸고, 그 사이 처녀는 일어서서 옷도 채 추스르지 못하고 절뚝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저…… 저! 이대로 놓아 보내선 안 된다!"

혹시 관아로 가 고변이라도 할 것을 두려워한 박가가 처녀를 잡으러 뛰어가자 김가가 허가에게 잡힌 손을 힘껏 뿌리친 후 박가를 막아 세웠다.

"그만하게! 너무 하지 않은가!"
"허 이런… 이 친구가 갑자기 왜 이래?"

처녀는 넘어지면서 다리를 접 질렀는지 멀리 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렸다. 김가는 급히 처녀에게로 뛰어가 등을 보이며 소리쳤다.

"여기 업히시오! 내 집까지 모셔다 드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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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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