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고기를 깨물자 벼 알이 씹히는데...

[2005 한가위 특집 3] 20년 전 선생님 모시고 동창회 열면서 일어난 사건

등록 2005.09.19 09:58수정 2005.09.19 16:25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졸업생 수가 32명 밖에 안 된 1981년 2월 졸업사진, 이것이 앨범이다. 나머지 선생님은 따로 찍었다. 병문, 동관, 상연, 기중, 육남, 상복, 규섭, 병섭, 승호가 그 앞줄에 해섭, 창균, 병규, 치권, 영만, 형채, 병석, 규환, 병천, 인수, 효순, 서운, 삼순, 일순, 김영임, 현희, 장영님,  정연님, 수연, 하옥, 영희, 해자, 순자

졸업생 수가 32명 밖에 안 된 1981년 2월 졸업사진, 이것이 앨범이다. 나머지 선생님은 따로 찍었다. 병문, 동관, 상연, 기중, 육남, 상복, 규섭, 병섭, 승호가 그 앞줄에 해섭, 창균, 병규, 치권, 영만, 형채, 병석, 규환, 병천, 인수, 효순, 서운, 삼순, 일순, 김영임, 현희, 장영님, 정연님, 수연, 하옥, 영희, 해자, 순자 ⓒ 김규환


동창회 준비하느라 바쁜 나날


근 한 달 전이었다. 5학년 3월 한 달만에 교감으로 영전하신 담임선생님께서 전근을 가시자 훨씬 더 젊고 잘 생긴 선생님께서 화령이와 송이 두 딸과 교사인 사모님까지 대동하고 오셨다.

선생님은 오시자마자 개혁을 단행했다. 느닷없이 반장을 두 달씩 번갈아가며 하라고 지시했다. 우린 깜짝 놀랐다. 1인 독재에서 아이들은 해방감을 맛보았다. 2년가량 서너 명이 반장을 바꿔가며 했는데 거기에 나도 끼게 되었다.

졸업을 하자 우린 동창회장을 새로 뽑지 않을 수 없었다. 공부로 1등은 놓쳤지만 육남이와 다른 친구를 제치고 당당히 동창회장에 뽑힌 나는 공고, 상고에 다니던 광주 친구들과 만나 상패 집에서 촛불을 손으로 받치고 있는 모양으로 페넌트를 직접 만들고 초등학교 동창회를 개최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여름방학부터 추석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고교 2학년이 흘러가고 있었다.

모교에 가서 교실을 하나 빌렸다. 초등학교 졸업 후 소식이 끊겼던 5, 6학년 때 담임을 맡았던 정광명 선생님께는 수소문을 하여 직접 찾아뵙고 추석 당일 모임에 꼭 참석하시라고 부탁을 드렸다.

째깍째깍 시간이 흘렀다. 추석 전날 32명의 졸업생 중 몇 명은 걷은 회비를 아끼기 위해 광주에서부터 환타, 사이다, 콜라 등 음료수에 사과 두 박스, 아이들이 좋아했던 '웨하스'에 '맛동산'과 비스킷을 듬뿍 사서 버스에 싣고 고향집으로 향했다.


대인동 광주공용터미널, 학동터미널을 거쳐 너릿재를 통과하고 적벽을 지나 학교 앞 종점까지는 2시간 반 가량 걸렸다. 만원버스였지만 버스 아래 짐칸은 미리 실어 놓은 우리 짐으로 거의 가득 차버렸다.

우린 서울로 다른 지방으로 간 친구들을 거의 다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짐을 초등학교 교실에 두고 다음날 일찍 학교에 모였다. 오랜만에 널빤지로 된 교실 바닥을 걷는 기분이 묘했다.


a 아주 많이 차린 북면동국민학교 제 15회 동창회는 한 때 잘 나갔다.

아주 많이 차린 북면동국민학교 제 15회 동창회는 한 때 잘 나갔다. ⓒ 김규환



졸업생 중 한명 빼고 다 모여 성황을 이루다

'북면동국민학교 제15회 동창회'라고 칠판에 크게 적고 식순도 적었다. 몸에 맞지 않는 걸상을 네모지게 만들고 과자며 사과 음료수를 풀어 차리니 행사 준비가 끝났다.

하나둘 마을에서 모인 숫자는 졸업생 32명에 딱 한 명 부족한 숫자였으니 현희만 빼고 거의 다 왔다. 다니다 전학을 간 미화와 선례도 참석했으니 대 성황이었다. 시시각각 시간이 다가오고 드디어 낮 12시 선생님께서는 도착하지 않았지만 개회를 선언하고 오락 및 다과회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각자 돌아가며 요즘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마디씩 하고 노래 한 곡씩을 불렀다. 히트 곡은 백영규의 <슬픈 계절에 만나요>와 <잊지는 말아야지>, 최혜영의 <그것은 인생> 이용의 <잊혀진 계절> 솔로로 데뷔한 구창모의 <희나리>와 한마음의 <갯바위> 김원중 씨가 부른 <바위섬> 등 최신 유행가가 거의 다 나왔다.

아이들은 내내 학교 앞 점방에 가서 선생님께 전화를 하라고 독촉을 했지만 마땅한 통신수단이 없었던지라 선생님댁에 확인 전화를 한번 하고는 오시는지 출발은 하였는지 영문을 모르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a 영만이와 승호, 해섭이가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

영만이와 승호, 해섭이가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 ⓒ 김규환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선생님께서 끝날 무렵 오시자 동창회 다시 시작

2시간여 발야구를 하고 나니 5시가 훌쩍 넘어갔다.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하자 기념 촬영을 하고 끝낼 참이었다. 이제 공식 행사를 접고 누군가의 집으로 가서 밤새 노는 일만 남았다. 꼭 오신다고 약조를 하신 분이 오지 않다니…. 허탈하고 야속하다는 말이 곳곳에서 들려왔지만 밤늦더라도 오실 것이니 기다려보자고 다독였다.

그 때였다. 택시 한 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학교 정문 앞에 선다. 우리는 운동장에서 정문 계단 쪽으로 우르르 달려 나갔다. 2년 가까이 우리를 정성으로 가르쳤던 분이 안 오실 리 없다며 굳게 믿고 있던 우린 선생님께서 오신 걸 직감하고 정신없이 뛰어나가 맞이했다. 일제히 90도로 꺾어 절을 했다.

“선생님!”
“그래. 벌써 이렇게 다 커버렸네.”
“선생님 저는 기억하시죠. 지난번에 찾아뵈었던 김규환입니다.”
“그래. 자네는 알겠고 나머지는 영….”
“자 친구들아 각자 소개해 올려라.”

파장(罷場)이 개업이라니. 감격의 순간 울먹이는 친구까지 있었다. 5년 동안 그리도 보고팠던 스승을 만나는 멋진 광경이었다. 서먹함도 잠시, 당시를 떠올려 촌구석 학생들을 하나하나 기억하시며 금세 친해졌다.

a 나는 연단에 있고 상연이와 준 동창 자격으로 참석한 미화도 보인다.

나는 연단에 있고 상연이와 준 동창 자격으로 참석한 미화도 보인다. ⓒ 김규환

사진 촬영을 정식으로 하고 나니 어둠이 짙게 깔렸다. 선생님께서는 광주 동구 용산동 댁으로 가셔야 한다며 1시간여를 머무르고 작별을 고한다. 우린 안 된다며 매달렸다.

만류하는 계략으로 당신께서 가르쳐 주셨던 “날이 밝으면 멀리 떠날 사랑하는 님과 함께~”로 시작하는 <석별의 정>과 연달아 “앞마을에 순이 뒷마을에 용팔이 열일곱 열아홉 처녀 총각~”으로 손을 잡고 부르며 당시 추억을 자극했다.

이때다 싶어 나는 동창회장 자격으로 선생님께 제안을 했다.

“선생님 우리 양지마을 해자 집으로 가셔서 닭도 잡고 약주도 한잔 하시죠. 낮부터 언제 오실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해자 집에서 닭죽에 저녁을 대접하기로...

우리가 줄기차게 잡아당기며 놓아주지를 않자 선생님은 아이들을 두고 그냥 떠날 수 없다는 걸 깨달으시고 결국 눌러 앉고 말았다. 급해지기 시작했다. 반은 거짓이었으니 주무실 댁과 음식을 만들 집을 찾아야 한다. 여관은 30리를 가야 하므로 동네에서 해결해야 한다. 회비는 넉넉히 남았으니 닭 값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간단히 애초에 꺼냈던 해자 집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아버지가 엄격한 여학생 한둘을 제외하고 모두 우리 마을로 몰려갔다. 이미 마을은 적막한 밤이었다. 닭 2마리를 사서 직접 잡기로 했는데 나마저 없으면 선생님께서 불안해 하실까봐 목만 비틀어 주고 아랫방에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닭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평소 닭을 잡아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었지만 오늘은 강례마을 친구들에게 맡겼다.

어찌 되어가는지 잠시 나가볼 뿐 오래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평소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몇 번이나 사람을 보내 재촉을 했다. 9시를 훌쩍 넘긴 시각 다들 출출하여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 그제야 들어오려나 보다.

남의 집 정지를 차지한 예닐곱 친구들은 마늘과 닭, 쌀을 넣고 푹 삶아 양푼에 조각조각 잘게 뜯어 죽을 먼저 푸고 몇 점씩 닭살을 올렸다. 선생님께는 닭죽과 소주 대병을 올리고 우리도 먹기 시작했다.

막상 먹어보니 아이들이 끓인 것이라 그런지 멀국과 쌀만 가득할 뿐 살점은 고작 두세 점이 다였다. 허겁지겁 죽을 두 숟갈 뜨고 무언가 큰 살점이 잡혀 대어를 낚았다는 기쁨에 숟가락이 흘러내릴 정도로 큰 내용물을 입에 물었다.

a 요리를 옆마을 친구들에게 맡긴 게 화근이었다.

요리를 옆마을 친구들에게 맡긴 게 화근이었다. ⓒ 김규환


닭죽에 든 밥통의 정체?

쫄깃하거나 흐물흐물 또는 물컹거려야 할 고기 아닌가. 그런데 대체 무얼 씹었는지 구리한 냄새가 나더니 꺼끌꺼끌한 것이 혀에 닿았다. 황당하게도 내가 씹은 건 닭 밥통인 위장이었다. 그 안엔 별 희한한 잡동사니와 쭈글쭈글한 벼가 들어 있었다. 그렇다고 당황한 기색이나 푸념을 할 수 없는 법이다.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가 두엄자리에 뱉어버렸다. 기분이 영 아니었다. 몇 번이나 닭똥 냄새를 씻어내느라 침을 게우듯 뱉었는지 모른다. 생전 처음 닭을 먹으면서 벼 죽정이 껍질을 씹은 게다. 비릿하면서 미끌미끌한 기분이 영 가시지 않았지만 입도 헹구지 않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먹어치웠다.

나에게 크나큰 형벌을 내린 주범은 부엌에 있던 친구들이었다. 칼질도 못하던 아이들이 2년 묵은 토종닭을 잡은 게 첫째 이유고 둘째는 고양이를 너무 많이 음식 옆에 두었던 점이다. 제들도 배가 고팠는지 고기를 뜯으면서 한 점 한 점 발라 입으로 넣다보니 양이 현저히 줄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이 내장을 구분할 수 없었기에 아직 소화가 덜 된 위장까지 넣고 끓여서 차려준 것인데 하필이면 내가 걸릴 건 무언가. 선생님께 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고 그날 일은 20년 동안 발설하지 않았다.

입맛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었다면 그게 닭백숙이 아닌 닭똥죽(?)이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겠지만 굶주린 애들이 그걸 어찌 알았겠는가. 허파도 보였고 창자도 거의 씻지 않은 채 쫄깃쫄깃 구부러진 모양으로 그냥 나왔으니 정말이지 할 말이 없었다.

아무 일 없이 밤이 깊어갔고 밤 12시가 다 되어 재롱잔치를 열고서 집으로 갔다. 선생님은 다음날 새벽밥을 드시고 우리 마을을 떠나셨고 아이들도 하나둘 정든 고향을 빠져나가 제 자리로 돌아갔다. 아! 잊혀지지 않는 1985년 추석날 밤이여.

a 선생님이 오시자 발간 햇살이 조금 남은 동안 전체사진을 찍었다. 선례와 미화도 보인다.

선생님이 오시자 발간 햇살이 조금 남은 동안 전체사진을 찍었다. 선례와 미화도 보인다. ⓒ 김규환

덧붙이는 글 | 아쉬운 명절이 가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아쉬운 명절이 가고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이 기자의 최신기사 역시, 가을엔 추어탕이지

AD

AD

AD

인기기사

  1. 1 "전세 대출 원금, 집주인이 은행에 돌려주게 하자" "전세 대출 원금, 집주인이 은행에 돌려주게 하자"
  2. 2 단풍철 아닌데 붉게 변한 산... 전국서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단풍철 아닌데 붉게 변한 산... 전국서 벌어지는 소름돋는 일
  3. 3 늙음은 자전거 타는 친구가 줄어들고, 저녁 자리에도 술이 없다는 것 늙음은 자전거 타는 친구가 줄어들고, 저녁 자리에도 술이 없다는 것
  4. 4 "한달이면 하야" 언급한 명태균에 민주당 "탄핵 폭탄 터졌다" "한달이면 하야" 언급한 명태균에 민주당 "탄핵 폭탄 터졌다"
  5. 5 대법원에서 '라임 술접대 검사 무죄' 뒤집혔다  대법원에서 '라임 술접대 검사 무죄' 뒤집혔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