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오마이뉴스 기자시로군요"

금강산 기행-3

등록 2005.09.20 14:29수정 2005.09.20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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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팔담 오르는 길목에서 내려다 본 풍경
상팔담 오르는 길목에서 내려다 본 풍경송성영
눈을 떠보니 새벽 다섯시 반. 베란다로 나왔다. 눈앞에 펼쳐진 고성항은 안개에 가려져 고요하기만 했다. 해변 도로에는 걷거나 뛰고 있는 관광 온 몇몇 노인들이 보이고 앞치마를 두른 호텔 종업원 몇몇이 잰 걸음으로 호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호텔 종업원들은 대부분 재중동포들이라고 한다.


저만치에서는 새벽 출항을 나서는 배 한 척이 가물가물 보였다. 어선인지 경비선인지 술병처럼 생긴 고성항 입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북측에 와 있다는 사실이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딘가 낯선 바닷가로 잠시 여행을 떠나온 느낌이었다.

우리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금강산 산행을 위해 온정각으로 향했다. 사람들의 표정이 첫날과는 달리 한결 여유가 있어 보였다. 관광 온 사람들처럼 들떠 보이기도 했다.

"여기 저기 개발할 곳이 참 많네."

온정각으로 향하는 관광버스가 너른 콩밭을 지나치는데 어떤 이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콩이 얼마나 여물었을까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떤 이는 개발의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이는 금강산 자락을 툭 터놓고 있는 너른 땅덩어리들이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다.

나는 우리 동네를 떠올렸다. 충남 공주시 계룡면. 행정수도가 들어오니 마니 하기 이전부터 투기 바람을 탄 지 이미 오래다. 요즘은 우리 집 사랑채 옆길을 타고 부동산 업자들이 들락거리고 있다. 계룡산이 훤히 보이고 그 아래 맑은 개울이 흐르는 우리 집 옆 산을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네들은 거기에 택지개발을 하겠다며 한창 이런저런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는 중이다. 그네들이 택지 개발을 하게 되면 땅 한 평 없는 우리 식구는 딱히 갈 만한 곳이 없다.


온정각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점심과 저녁 식권을 끊고 우리는 다시 '개발의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과 일행이 되어 곧바로 금강산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송성영
금강산 구룡연에 오르는 길목에서 만난 기암괴석들과 물빛, '아! 여기가 말로만 듣던 금강산이로구나!'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녹음 짙은 한여름도 아니고 형형색색 단풍에 물든 가을도 아닌 어정쩡한 9월 아흐레였지만 금강산은 역시 금강산이었다.


우리 부부는 절경에 취해 오르다가 산악구조대원으로 보이는 20대 후반의 젊은 사내를 만났다.

"구룡연까지 여기서 얼마나 걸리지요?"
"금방입네다."
"관광객들이 올 때마다 매일 같이 산행을 합니까?"
"그렇지요."
"엄청 힘들 건데요."
"늘 하는 일인데요, 뭘."

억양이 어딘가 모르게 낯설어 재중동포인가 싶었는데 그 젊은 사내의 가슴에 달린 붉은 배지가 눈에 띄었다.

"어? 북측 분이시네? 어이구 반갑습니다. 난 또 재중동포신가 했는데 아녔구먼."
"뭐 다를 게 있겠습네까? 남측이나 북측이나 다 같은 동포 형젠데."

금강산 구룡연 오르는 등산로
금강산 구룡연 오르는 등산로송성영
그 북측 사내 말대로 다를 게 없었다. 이곳이 단지 북측에 있는 금강산 산길이라는 것 뿐, 계룡산 어느 만치 산행 길에서 사람 좋은 산 사람을 만났을 때처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기분이 묘했다. 그토록 고대했던 북측사람과의 대화였지만 참으로 싱거웠다. 짠하게 가슴 속 깊이 저려오는 감동보다는 그냥 순박한 산 사람과의 만남에서 오는 즐거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내가 북측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부터 금강산에 첫 발을 디뎠을 때처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금강산의 절정을 저만치에 두고 그 북측 사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이러저런 얘기를 나누며 산을 올랐다.

"결혼은 했남유?"
"아직 결혼 안했습네다."
"결혼할 사람은유?"
"결혼할 사람은 없습네다. 날 좋아하는 여자가 있긴 한데 생각 없습니다."

"왜요?"
"별로 맘에 들지 않습니다"
"여기선 보통 몇 살에 결혼 하나요?"
"이곳에선 보통 서른 정도 되면 결혼하지요. 근데 선생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공주요, 충청남도 공주. 백제의 옛 도읍지 아시죠?"

"아, 예 그렇습니까. 지리산은 가보셨습니까?"
"그럼요, 한 여덟 차례는 가봤지요."
"예전에 지리산에서 구조대원으로 일하는 사람을 만났드랬는데 우리하고 생활이 비슷해서 그런지 말이 잘 통 하더군요."
"나는 시골에 농사 좀 짓고 사는 촌놈인데, 고향이 어디십니까?"
"온정리가 고향입니다."

우리는 아주 일상적인 얘기를 나눴다. 김일성 주석이나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관한 얘기를 꺼낼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고 생각보다 이북 사투리도 별로 쓰지 않았다.

그 북측 사내와의 정겨운 대화 때문이었는지 산행 길이 가벼웠다. 우리는 그 사내와 금강문 근처에서 헤어졌다. 헤어지기가 아쉬워 아내는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근무시간이라서 사진은 찍을 수 없습니다."

송성영
금강문을 빠져나오자 눈앞에 수정같이 맑은 물이 구슬처럼 흘러내리는 옥류동이 나왔다. 옥류동에서 연주담을 지나자 마치 봉황새가 창공을 향해 은빛날개를 펴고 긴 꼬리를 휘저으며 나는 것 같다하여 이름 붙은 비봉폭포, 봉황새가 춤추는 듯한다하여 붙은 무봉폭포가 나왔다.

그리고 마지막 산행길인 구룡폭포. 예로부터 고운 최치원, 겸재 정선 등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짓고 화폭에 담았던 구룡폭포. 폭포수는 마치 흰 비단을 길게 늘어뜨린 듯 했고 그 아래 맑다 못해 푸른빛을 띤 구룡연은 벌컥 벌컥 단숨에 들이 키고 싶은 심한 갈증마저 불러 일으켰다.

비단을 늘어뜨린 것 같은 구룡폭포
비단을 늘어뜨린 것 같은 구룡폭포송성영
나는 구룡연에 오르기까지 물빛에 취하고 기암괴석들에 혼을 빼앗겨 부지런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구룡연까지는 나이 든 분들도 쉽게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산행 길이 완만하기도 했지만 걸음걸음마다에 펼쳐진 절경에 취하다보면 한 걸음에 오를 수 있다.

우리는 구룡연에서 내려오다가 다시 왼쪽으로 꺾어지는 산행 길을 택했다.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상팔담 오르는 길이다. 상팔담 오르는 길은 급경사로 이어졌다. 몇 개인지조차 셀 수 없을 만치 수 없이 많은 가파른 철계단을 거쳐야 한다.

드디어 숨 가쁘게 상팔담에 올랐지만 꼭대기는 온통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상팔담 발아래로 구룡폭포가 보이고 저 멀리 동해 바다까지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사방 10 미터조차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가 막혀 있었다.

아내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데 깡마르고 인상이 날카로운 한 사내가 말을 건네 왔다.

"두 분이 참 좋아 보이십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북측 분이시네. 아이구 반갑습니다. 공주요, 백제의 옛 도읍지 공주 아시죠?
"그럼요, 잘 알지요."

송성영
가슴에 붉은 배지를 단 북측 사내는 날카로운 인상에 비해 말씨는 부드러운 편이었다. 그는 내 목에 건 관광증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말을 이었다.

"아, 오마이뉴스 기자시로군요!"
"아세요? 오마이뉴스를?"
"어떤 신문인지 알고 있지요."

나는 금강산 관광 신청을 할 때 신청난에 직업과 직위 따위를 적는 곳에 적당히 쓸 것이 없어 농사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라고 적어놓았는데 관광사 측에서 농사는 적지 않고 <오마이뉴스> 기자라고만 적어 놓았다.

관광사 측에 <오마이뉴스> 상근 기자가 아니라 수 만 명 중 한 명인 시민기자라고 수정해 달라 했는데 이미 관광증이 찍혀 나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그냥 직업란에 <오마이뉴스> 기자가 적힌 관광증을 달고 다녔는데 정작 함께 관광 온 남측 사람들은 <오마이뉴스>에 대해 잘 알지 못했지만 뜻밖에 북측 사람이 알아봤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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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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