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만 상처받는 게 아니야, 선생님도 상처받아"

쉬운 길과 옳은 길

등록 2005.09.20 17:09수정 2005.09.21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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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 조퇴시켜 주세요."

조회를 하러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윤지(가명)가 나를 기다리고 서 있다가 말을 걸었다. 인사도 없이 퉁명스럽게 내뱉은 말이어서 기분이 나빴다기보다는, 무방비 상태로 걸어가다가 발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반사적으로 주춤거리며 곱지 않는 시선을 아이에게 던졌다. 목소리에도 화가 실려 있었다. 어차피 절반은 화가 난 흉내를 낸 것이었지만.

"녀석아, 인사라도 하고 조퇴시켜달라고 해라."
하지만 윤지는 퉁명스런 표정을 풀지 않고 자기 말만 할 뿐이었다.
"4교시 끝나고 조퇴시켜주세요."
"왜 조퇴하려고 그러는데?"

"오늘 할머니 집에 가야 돼요. 할머니 집이 먼데 조퇴 않고 어떻게 가요?"
"허허. 요 녀석 말버릇 봐라."
"할머니가 아프신데 안 갈 수 없잖아요?"

이쯤해서 나는 흉내만이 아닌 진짜 화가 솟구치려고 했다. 솟구치려고 한 것이지 솟구친 것은 아니어서 그래도 말끝이 거칠면서도 부드러웠다.

"누가 가지 말래? 처음부터 네 사정을 공손하게 말했어야지?"
"어제 조퇴해달라고 말씀드리니까 선생님이 내일 말하라고 그러셨잖아요."

"그건 네가 오늘 4교시 끝나고 조퇴한다고 하니까 오늘 말하면 되겠다 싶었지."
"그래서 지금 말하잖아요."

"그게 공손하게 말한 거야? 선생님 보고 인사도 않고 들어오자마자 퉁명스럽게 조퇴해달라고 하는데 누가 기분 좋겠니?"
"그럼 조퇴 안 해주실 거예요?"


"누가 안 해준대?"
"그럼 빨리 해주세요."

나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다지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설명을 해주었는데도 말귀를 못 알아먹는지, 아니면 어제의 일로 심사가 틀어져 있었기 때문인지 여전히 퉁명스런 표정을 풀지 않는 아이의 겨드랑이라도 간질여서 웃는 모습을 보고야 말겠다는 그런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런 내가 버럭 화를 내다못해 책상까지 내리치며 사뭇 달라진 눈빛을 아이에게 보이게 된 것은 그 후에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었다기보다는 어쩌면 그것도 하나의 흉내나, 혹은 나도 모르게 감행한 작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작전 명령은 '선생님을 대하는 버릇이 꽝인 한 아이를 구해라' 정도였을까?

나는 아이에게 할머니가 어디에서 사시는지, 갈 때는 누구랑 함께 가는지, 할머니가 얼마나 많이 편찮으신지를 물었거나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대답을 하는 아이 특유의 무뚝뚝하고 퉁명한 표정은 조금도 달라질 기미조차 없었던 것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화가 폭발했고, 다행히도 윤지는 군소리 없이 자리에 들어갔다. 이럴 때 가끔 교사의 권위에 관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대로 화를 풀지 않고 아이가 내게 와서 사과를 하고 조퇴를 해달라고 사정을 할 때까지 기다리면 그만 아닌가. 아마도 그 여파는 학급 전체 아이들에게까지 퍼져 그날 이후로 이런 조퇴 따위의 문제를 가지고 신경을 쓸 일이 없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어디 그뿐인가? 조회 시간이 되면 내가 먼저 환한 얼굴을 하고 인사를 해도 아무도 답례를 하지 않는, 그래서 한 번 더 또 한 번 더 교실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인사를 해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는 아이들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학기 초에 꽉 잡았다가 조금씩 풀어주면 한 해 내내 아이들 때문에 골치 아플 일이 없으리라는 동료교사들의 충고가 진리처럼 가슴에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이런 위기에서 내가 선택한 길은 언제나 쉬운 길이 아니라 옳은 길이었다. 더디고 억울해도 그 옳은 길을 선택한 나에게 한 번도 손해 보는 일이 없었다는 것은 진실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나는 윤지를 불러내기 전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윤지와 있었던 과거의 일들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윤지가 내게 보낸 첫 편지에는 나의 첫인상이 너무 좋았다는 말과 함께 소녀 특유의 곱고 아름다운 말들이 깨알같이 박혀 있었다. 이런 아이였다니! 싶을 정도로 속내가 깊고 따뜻한 아이였던 것이다. 문제는 그런 표현을 쉽사리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것뿐이었다.

나는 윤지를 나오라고 했다. 복도로 가서 얘기를 할까 하다가 전체 아이들 앞에서 화를 냈으니 전체 아이들 앞에서 풀어줄 필요가 있었다. 아니, 다른 아이들도 이번 기회에 제 담임의 속내와 진실을 알 필요가 있었다. 나는 원망이 가득 찬 아이의 검은 눈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 너에게 다정하게 말하지 않고 퉁명하게 대하면 기분 안 좋지? 나도 네가 나에게 퉁명하게 말하면 기분이 안 좋아. 네가 아무런 감정 없이 말을 그렇게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 아까 선생님 너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어. 화가 나기는 했지만 미운 감정은 눈곱만큼도 없었어. 하지만 너처럼 말을 그렇게 퉁명스럽게 한 거야.

아침마다 선생님은 교실에 들어오면서 너희들에게 인사하지. 그런데 넌 인사를 받아준 적이 없을 거야. 그것이 선생님에게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거 다 알아. 그래도 난 섭섭했어. 아니 상처를 받기도 했어. 너, 오늘 선생님에게 상처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랬다면 사과할게. 하지만 너만 상처 받는 게 아니야. 선생님도 상처 받아."

정말 아이들은 모를까? 선생님도 아이들 말 한 마디, 표정 하나에 상처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윤지의 표정을 보니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감정을 자제하느라 애썼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고인 눈물을 아이가 보았을까? 아니면 상처라는 말의 위력 때문이었을까?

말을 마칠 무렵, 원망이 가득하던 아이의 눈이 어떤 알 수 없는 다른 표정으로 채워지고 있는 것을 나는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혹시라도 순전한 나의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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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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