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그 깐 걸로 죄송합네까"

[금강산 기행4 ] 남북 상팔담 정상 담화(?)를 열다

등록 2005.09.23 09:35수정 2005.09.23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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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연 오르는 길목에서 만난 금강산 풍경
구룡연 오르는 길목에서 만난 금강산 풍경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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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아세요? 오마이뉴스를?"
"얼마 전에 오마이뉴스 기자 선생을 만났습네다."


환경감시원으로 보이는 30대 초반의 북측 사내는 <오마이뉴스>가 보수 언론인 조중동과는 달리 통일에 큰 힘을 실어주는 인터넷 신문으로 알고 있었다.

"조중동 신문들은 뭐 때문에 고렇게 통일 하자는데 반대가 심합네까?"
"밥그릇 때문이겠쥬, 밥 한 그릇 더 챙겨 먹겠다구 그러는지도 모르죠"

나는 그에게 <오마이뉴스>에 근무하는 기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냥 수 만 명의 시민기자 중에 한 명일 뿐이라고 했다.

"사실 말유, 난 관광 올 형편이 못됩니다."

나는 그에게 금강산 관광객이 이미 100만 명을 돌파한지 오래라고는 하지만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오지 못하는 남측 사람들이 부지기수라고 했다. 그는 남측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금강산에 올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지 내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기자신데, 남측 기자 선생들은 형편이 괜찮다고 들었는데…."
"그거야 조중동 같은 기자들 얘기죠, 우리 시민 기자들은 그네들처럼 돈 보고 기자질 안 하쥬. 그냥 자발적으로다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마이뉴스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볼 수 있죠."

"선생님은 금강산에 올 형편이 못 된다고 하셨는데 그럼 어떻게 해서 오셨습네까?"


나는 그에게 <오마이뉴스>에서 광복 60주년기념 '우리 가족과 8.15'라는 주제의 기사 공모에 뽑히지 않았다면 통일되기 전에는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해줬다.

"공주에서는 뭘 하십네까?"
"농사 좀 짓고 가끔씩 시민단체 회원으로 일을 거들어 주기도 하죠."

"그 시민단체라는 게 어떤 단쳅네까?"
"우금티 기념 사업회라고, 동학농민전쟁 아시죠?"

"갑오농민전쟁 말씀이십네까?"
"공주 우금티는 바로 그 갑오농민전쟁의 마지막 전투지라고 할 수 있죠."

"아, 알겠습네다. 얼마 전에 평양에서 남측 사람들이 '금강'이라는 가극을 공연 했잖습네까, 거기에 갑오농민군과 전봉준 장군이 나오는데 공주가 바로 그곳이죠?"

우리는 동학농민군들을 얘기했고 전봉준 장군을 얘기했다. 일제에 맞서 싸웠던 항일 투쟁의 역사를 얘기했고 우리 민족끼리 통일을 이뤄야만 하는 당위성을 얘기했다.

그는 '김일성 주석의 항일투쟁에 관해 남측에서는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물었고 나는 '김일성 가짜론' 등의 허구를 만들어 온 극우 보수 세력들, 반공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식으로 반공에 꽁꽁 매달려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대부분은 김일성주석의 항일투쟁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사람들은 남한사람들을 어떻게… 북측이라고 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북한'이라 호칭을 썼던 내가 죄송하다고 말하자 북측 사내는 나와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내는 사이처럼 내 어께를 툭 치며 오히려 미안해했다.

"아, 괜찮습네다. 뭘 그 깐 걸 게지구 죄송합네까, 괜찮습네다."

북한을 북한이라 말 했는데 호들갑을 떨게 뭐가 있냐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금강산에서는 공식적으로 '북측'과 '남측'이라고 부르기로 합의 했다. 우리는 북측에 들어올 때 관광조장으로부터 교육을 받았었다. 북한이라고 하면 북측 사람들이 기분 나빠하니 조심하라고. 말 한마디 잘 못했다가는 벌금까지 물게 된다는 것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북한'이라는 호칭은 순전히 남측만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다. '북한'은 북쪽의 대한민국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북측에서는 당연히 받아드릴 수 없는 문제다. 북측은 엄연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북측에서 대한민국을 남조선이라 한다면 그 또한 남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 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이 역시 남측에서도 받아 들릴 수 없는 문제다.

사실 '남측' '북측'이라 부르는 것 또한 썩 좋게 들리지 않는다. 서로를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호구지책으로 이런 호칭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가장 좋은 호칭은 서로의 국호를 불러 주는 것이다. 고구려를 고구려라 부르고 백제를 백제라 부르듯이 말이다.

"분위기 좋네요. 상팔담 정상에서 남북이 만나 얘기하니까. 남북 상팔담 정상 회담이네, 회담?, 회담은 그렇고 담화라고 할까?"

그렇게 우리는 남북이 함께 공유했던 해방 이전의 역사를 주고받으며 아내 말대로 '남북 상팔담 정상 담화'를 나누고 있었다. 함께 말 할 수 있는 것 보다 함께 말 할 수 없는 것들이 훨씬 더 많았지만 함께 얘기할 수 있는 공동 관심사는 얼마든지 있었다.

우리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상팔담 꼭대기에 오른 대부분의 남측 사람들은 북측 사내에게 반갑게 인사말을 건네곤 했다. 하지만 다들 우호적인 인사말을 건네는 것은 아니었다.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불쑥 끼어들어 냅다 찬물을 끼얹는 사람도 있었다. 남북 사이에 끼어 든 미국처럼.

"다들 실내화 같은 운동화를 신었던데 이 양반은 등산화를 다 신었네…."

막무가내로 툭 던진 남측 사람의 한마디는 옆에 있던 내가 무안해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북측의 모든 것을 자신이 세워놓은 경제 논리에 적용시키고 있는 듯했다.

그 남측 사람말대로 북측 사내의 신발은 산행길에서 만난 다른 북측 사람들과는 달리 등산화였다. 하지만 그가 입고 있는 옷감은 다른 북측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형편없이 낡아 있었다.

내 차림새 역시 그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오일장 시장 바닥에서 구입한 싸구려 운동화와 창고에 버려져 있던 광목으로 아내가 만들어 준 옷을 입고 있었다. 국적을 알 수 없는 5천 원짜리 운동화와 먹물을 들여 재봉질한 허름한 옷이었지만 전혀 불편함도 부끄러움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아내가 손수 만들어 준 옷들이 너무 좋다. 그 북측 사내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이 등산화는 어디서 구했나…?"

남측 사람이 눈을 내리 깔고 다시 반말 비슷하게 말했다. 그의 말투에는 '주제에 등산화는 뭔 등산화냐'는 식의 비아냥거림이 숨겨져 있어 보였다.

북측 사내는 대꾸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남측 사람들로부터 한두 번 당해 본 일이 아닌 듯 했다. 하지만 그는 웃고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눈빛을 보았다. 실내화 타령을 했던 남측 사람을 바라보는 그 사내의 번뜩였던 눈빛을. 비록 차림새는 다 낡아 있었지만 눈빛은 당당했다.

나는 지금도 북측 사내의 뻔득였던 그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그 눈빛은 '미국 놈들 한데 멱살 잡혀 사는 놈들이 뭐가 잘났다고, 니들이 신고 있는 값비싼 신발들은 미국놈들 한데 빌붙어 얻은 신발들이 아니냐' 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실내화 운운하는 남측 사람의 시선을 가로막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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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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