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나갔다 온다더니 너무 늦었군."
조국명의 짐작은 그 사내를 본 운규룡의 말로 확인이 되었다. 사내는 풍철한과 조국명을 힐끗 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우며 빈 자리에 가 앉았다.
"걱정이 되었을 뿐이오."
사내는 자리에 앉자마자 술잔을 들어 훌쩍 마셨다. 반점에서와 마찬가지로 풍철한을 주시하는 그의 눈에는 먹이를 앞에 놓은 맹수처럼 긴장감이 떠올라 있었다. 풍철한이 손에 들고 있는 술잔을 다시 천천히 입가에 대었다.
"듣지 말아야 할 소리를 듣고,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왔군."
나직한 중얼거림이었지만 선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또렷하게 들을 수 있었다. 운규룡이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으음… 소제도 풍형을 모시라고 한 것이 후회가 되는구려."
운규룡의 말은 진심이었다. 목적이 있어 부르기는 했지만 풍철한과는 한 때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사이였다. 못 본지 오래 되었지만 막상 만나고 보니 옛 정이 느껴졌던 것이다.
"한 잔 뿐이었는데 매우 취하는군."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 걸 거요."
운규룡이 미안한 듯 말하자 풍철한이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독(毒)을 탔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거요."
운규룡은 풍철한을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슬그머니 돌리며 옆에 앉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운규룡의 옆에 앉은 여자는 다른 여자들 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였는데, 화장 때문인지 나이를 확실하게 파악하기 어려웠다.
여자란 묘해서 외양만으로는 나이를 알 수 없는 일이 많다. 얼굴을 웃거나 찡그리고, 뾰로통하거나 재잘대기 시작하면 비로소 대충 나이를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여자는 운규룡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머물자 배시시 웃었다.
"운대공자님의 말씀이 옳아요. 몇 가지 섞어 타고, 뿌리기는 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요. 하지만 당분간 움직이기에는 불편하실 거예요."
여자의 목소리는 듣기 편하지 않았다. 약간 쉰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본래 목소리가 그런 듯싶었다. 운규룡이 무언가 작정한 듯 약간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미처 인사를 시키지 못했구려. 독접(毒蝶) 호낭자(胡娘子)라고 들어 보셨소?"
풍철한은 표정의 변화 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들었지. 그것도 아주 많이 들어 보았네."
독접 호낭자라는 명호가 주는 무게는 풍철한이 한가롭게 이야기 할 정도로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풍철한과는 달리 조국명은 내심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되자 극도로 조심하고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는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느낌이 이상하여 최대한 독에 대해 경계를 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는 스물아홉. 열일곱에 살천문에 입문하여 스물여섯의 나이로 열세명의 최고 살수 반열에 든 여살수. 오십 회에 걸친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 이 정도면 되었나?"
풍철한의 말에 운규룡은 의외라는 듯 검미를 추켜올렸다. 하지만 그가 무어라 하기 전에 풍철한이 말을 이었다.
"아니 한 가지 더 있군. 운남(雲南) 원양(元陽) 출신으로 남만인(南蠻人)들이 사용하는 독(毒)에 능함. 이제 대충 된 것 같군."
"호오… 세상에 천하의 풍철한 대협께서 소녀에 대해 이리도 모든 것을 알고 계시니 영광이라 말씀드려야 하나요?"
독접이 진정으로 놀랐다는 듯 입술을 오므리며 눈을 깜빡였다. 매우 흥미가 당긴다는 표정이었다.
"아직 내가 모르는 게 두 가지 정도 있으니 감탄할 필요 없지."
"그게 뭔가요?"
"하나는 왜 살천문에 몸담고 있는 호낭자가 이곳에 있느냐 하는 것이고…."
말을 하다말고 풍철한은 고개를 저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상해…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뜬금없이 말을 하다말고 중얼거리는 풍철한을 보고 모두 의아스럽다는 기색을 띠웠다. 지금 자신의 처지가 어떠하다는 것쯤을 알 풍철한이 태연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도 의문이었지만 그가 이상하다고 한 의미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뭔가 그리 이상한가요?"
"이곳에 많지도 않은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하나같이 같이 어울릴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는단 말이지. 그런데 어떻게 모여 있게 되었을까?"
그 말에 운규룡을 비롯해 세 남자와 독접 호낭자의 얼굴이 짧은 순간 변했다.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지켜보는 풍철한과는 달리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마저도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이 지나자 분위기는 냉랭해졌고 미세한 살기마저 배어나오고 있었다. 특히 회의무복의 사내는 노골적으로 살기를 뿜고 있었다. 독접이 감정을 가라앉히며 입술을 열었다.
"풍대협은 죽을 때까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할 거예요. 우리를 충동질해 그 이유라도 짐작하려는 얄팍한 심계(心計)를 쓰려고 노력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건 그렇고 소녀에 대해 또 한 가지 모르는 게 무엇이죠?"
풍철한이 씨익 웃으며 운규룡을 비롯해 나머지 세 남자를 쭉 훑었다.
"호낭자의 잠자리 기술은 어떨까 하는 것이오."
이것은 분명 충동질이었다. 누군가가 도발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말하기 전에 네 사내들을 바라 본 것은 누가 독접 호낭자와 관계를 가진 적이 있느냐는 의미였고, 백결이라는 사내를 제외한 세 인물은 그 말과 눈빛에 모욕을 당한 듯 아주 불쾌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독접은 얼굴을 약간 붉히고 입술을 꼬옥 깨무는가 싶더니 갑자기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꼭 알고 싶으신가요?"
그 말에 모두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풍철한은 여전히 능글맞게 대답했다.
"기회가 된다면…."
"그것은 어쩌면 풍대협이 죽기 전까지 알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이 말은 사실 아직 시집가지 않은 여자가 할 말은 아니었다. 속뜻은 다른 것이었는지 몰라도 할 수 있는 말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말을 하는 독접이나 듣는 풍철한의 얼굴은 농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자네… 를 좀 부축해 주겠나?"
풍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듯 술잔을 내려놓고 조국명에게 말했다. 이미 중독 되었는지 미간에는 희미한 혈선을 내비치고 있었다.
"힘든가?"
"아니…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왔으니 조금이라도 일찍 자리를 비켜 주어야 하지 않겠나?"
그 때였다. 회의무복의 사내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 때는 마음대로 왔지만 갈 때는 마음대로 갈 수야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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