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기차기가 올림픽에라도 나온다던?"

[동무들의 악다구니 10]어렴풋이 떠오르는 제기 차던 어린시절 꿈

등록 2005.10.18 12:00수정 2005.10.18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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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고추밭에 개망초와 질경이가 새로 돋아나 포기가 들어가는 요즘 제기차기 시작하는 철이다.

고추밭에 개망초와 질경이가 새로 돋아나 포기가 들어가는 요즘 제기차기 시작하는 철이다. ⓒ 김용철

화살촉을 만들려고 대밭에 가자면 큰집을 지나야 한다. 뒤쪽 사립문을 나가려던 차 마침 성주형이 있었다.


"성, 뭣 헌가?"
"왔냐?"
"잉."


굴러다니던 탄피 하나와 우산대만 있으면 뱁새, 굴뚝새, 참새, 산비둘기와 꿩, 고라니까지 잡는데 아무 흠잡을 데 없는 사제 총도 거뜬히 만들던 재간둥이 사촌형이 또 망치를 들고 뭔가를 토닥거린다.

반짝반짝 빛나는 은빛과 거무튀튀한 색이 절반씩 섞인 덩어리를 쪼개고 있었다. 납덩어리다. 본채 뒤안에 있던 할머니 방 아궁이에 불은 쇠죽을 쑨 지 오래였지만 숯덩이가 이글이글 발갛고 푸르스름하다.

양재기에 덩어리를 넣고 달군다. 15분 쯤 지나 촛농 같이 묽게 되고 순수하고 하얀 것과 이물질이 들어있는 걸로 자연분리가 되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찻숟갈로 위에 동동 뜬 잡티를 한참동안 걷어낸다.

"앗 뜨거워."


옮기려고 헝겊을 감쌌는데도 온도가 보통이 아니라 여전히 뜨거운가 보다. 맑은 쇳물만 슬슬 흔들어 식혀가며 둥글납작한 단추 모양으로 엽전을 만들 모양이다.

"오래 걸릴랑가?"
"잉. 요것이 식을라믄 째까 지달려야 헝께 조심히 대 쪄 와라."
"한나 줄꺼여?"
"그래 얼렁 갔다와."



어둠침침한 백설기 같은 눈이 바삭거리는 대밭에서 가는대를 몇 개 잘라왔다. 아직 뜨끈뜨끈한 납 동전을 돌에 올려 집으로 왔다. 대를 한쪽에 던져놓았다. 오늘은 제기나 만들어 자랑하며 아이들이랑 놀고 싶었다.

다른 아이들은 10원짜리 동전으로 만들지만 내겐 더 묵직하고 단단한 납이 있질 않은가. 열두 가지 동물이 그려진 일력(日曆) 두장을 찢었다. 둘둘 말고 접어서 묶고 술을 잘게 찢었다. 금방 제기가 만들어졌다. 마당에서 높이 날려보았다. 지붕까지 올랐다가 낙하산처럼 급전직하 하는 걸 보니 제대로 만들어진 듯하다.

a 풍년초라 불렀던 개망초는 한 포기를 뽑으면 그냥 차도 좋을 정도로 묵직해서 좋았다.

풍년초라 불렀던 개망초는 한 포기를 뽑으면 그냥 차도 좋을 정도로 묵직해서 좋았다. ⓒ 김규환

여름철엔 질경이를 서너 개 모아서,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는 풍년초라 했던 개망초를 캐서 제기차기를 하고 놀던 내게 비닐이나 노끈, 플라스틱으로 만든 제기에 비견할 바 못되는 최고급 제기가 있으니 나는 한동안 동네에서 인기를 독차지하고도 남는다. 골목길을 달려 고샅 밖으로 나가보니 아이들이 몰려 있었다.

"야, 고만 허고 이걸로 하자."
"뭔디야?"
"잉, 우리 성아가 납덩어리를 줬거든."


모두 내 제기에 관심이 쏠렸다. 술 길이도 길고 두 배나 많이 달렸다.

"어디 어디?"
"높이 한번 떵거봐."


하늘하늘 춤을 추지 않고 학이 물고기를 잡기 위해 잠수하듯 날렵하게 떨어진다. 내 제기의 위력을 실감하지 못하는 여자애들은 아까 차고 있던 제기를 발 안쪽으로 차지 않고 발등으로 이상하게 차고 있다.

나는 막차기로 포문을 열었다.

"한나 두울 서이 너이 다섯 여섯 닐곱 야달 아홉 열…."

제자리를 맴돌며 발을 디뎠다가 목까지 차올려 오르락내리락하자 아이들은 옆에서 숫자를 세가며 덩달아 끄덕끄덕하듯 목이 위아래를 따라다닌다. 팔도 한 개 한 개 찰 때마다 같이 움직인다. 스무 개 가량을 차다가 복숭아씨에 엽전 부분이 맞았는가 싶었다.

""앗야! 원매 아픈 거. 인자 니기들 차라. 아구구."

문지르며 추스르고 있는 사이 한 발을 들고 정지한 채로 발들고차기를 하는 성호, 뒷짐을 지고 양발차기로 기술을 뽐내는 병주, 시린 손을 호주머니에 푹 찔러 넣고 귀나 눈 위까지 차보는 병문이, 찼다가 입으로 물어 손으로 받고 다시 차는 해섭, 차서 머리에 얹었다가 차보는 병섭이까지 다들 특기를 꺼내 선보인다.

다들 새 제기와 익숙해지는 시간은 잠시였다. 보통은 기본인 막차기로 많은 개수를 차는 아이가 이기면 종인 술래가 제기를 던져주고 나머지는 번갈아가며 멀리 차며 놀았지만 오늘은 아이들 숫자가 많아 여럿이 같이 둘러차기를 하기로 했다. 요즘 대학가에서 우유팩을 오므려 차는 놀이의 시원(始原)인 셈이다.

"누구부터 찰래?"
"나부텀."


해섭이가 먼저 시작했다. 여섯 명이서 둥글게 원을 만들어 찬다. 이제부턴 순서가 없다. 자기 앞으로 제기가 오면 차야한다. 쫑긋 모든 잡념을 떨치고 총집중하여 다른 동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다. 두 번째는 성호가 찼다. 나중에 축구선수로 뽑힐 뻔 했던 발재간이 좋은 성호는 혼자서 세 개를 찼다.

주거니 받거니 때론 낮게 어떨 땐 높게 오른다. 릴레이가 무척 길어졌다. 나는 속으로 내 앞으로는 제발 오지 않기를 바랐다. 괜히 와봤자 헛발질을 할 수도 있고 자칫 발이 늦게 나갔다가는 누가 와서 채갈지 모른다.

10분쯤 찼으면 술래를 정해야 맛난 밥을 주워 먹는다. 병문이 쪽으로 제기가 가자 옆에 있던 병섭이가 발을 꺼냈다. 둘 다 발이 올라왔다. 순간 교란작전에 나선 키가 크고 발이 긴 병주가 끼어들어 "얍!"하며 허공으로 멀리 차버리고 말았다.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아따매. 내가 찰라고 했는디…."
"나도."
"야색끼들아 잔소리 말고 둘이서 떵거줄 생각들이나 혀."


a 질경이는 한 뿌리로 모자라 뿌리는 버리고 줄기를 모아 한데 묶어서 차면 근사한 제가가 만들어졌다.

질경이는 한 뿌리로 모자라 뿌리는 버리고 줄기를 모아 한데 묶어서 차면 근사한 제가가 만들어졌다. ⓒ 김규환

술래가 둘이나 생겼다. 한 놈 끝나면 또 찰 생각을 하니 기분이 째질 듯 좋았다. 먼저 병문이가 던지고 병주, 성호, 나, 해섭이 옆으로 줄줄이 섰다.

"떤져!"

"휘이익~"


제기가 수술을 펄럭이며 춤추며 날아오자 머리 위로 잽싸게 차버린다. 성호는 던져준 제기를 다섯 번 더 차고는 막판에 아무 데고 날렸다. 가까스로 길가에 버티고 있는 제기가 하마터면 도랑으로 떨어질 뻔 했다.

구시렁거리며 아까운 듯 찾아오는 병문이 앞에서 당당히 내 차례를 기다렸다. 두 친구가 차고 있는 동안 나는 고무신코빼기와 발등 양말 사이에 집에서 가져온 공책 겉장을 접어 넣었다. 맘껏 멀리 보내기도 하지만 잘못 맞았을 때 돌부리에 채인 것보다 더 큰 아픔을 막을 수 있으니 간간히 써먹던 방법이었다.

제기를 던지자 인스텝킥으로 힘껏 찼다. 정면으로 날아갔다. 큰일이다. 그러다 받기라도 하는 날엔 더 많은 재미를 볼 수 없잖은가. 얼굴로 갔지만 눈도 감지 않고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다행히 속도가 빨라 두 손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고 말았다.

"휴~"

간덩이가 쪼그라드는 줄 알았다. 병문이 손에는 깃털만 한 올 들려져 있다. 해섭이는 헛발질을 하는 통에 그걸로 끝이었다. 다음 순번이 돌아오자 병주는 새끼를 쳐서 내게 줬다. 내가 손으로 받아서 세 개를 찼는데 병문이가 득달같이 잡으려고 한다. 서둘러 불을 꺼야 한다. 다른 아이에게 차버리니 찬 개수만큼 더 던져줬다.

녹초가 된 병문이 다음 술래인 병섭이는 꾀가 많은지라 헛발을 유도하고, 몇 번 심부름을 하다가 받아서 죽이고, 발로 되받아 차서 아웃시키고, 물에 빠트린 아이들 덕에 금방 끝이 났다.

멀리차기로 거리를 재서 또 술래 골탕을 먹이기도 했다. 그렇게 두어 시간 놀았을까 배가 슬슬 고파지자 제기차기는 막을 내렸다. 동네 아이들 죄다 몰려나와 제기를 그렇게 열심히들 찼으니 태권도 종주국 실력과 체면이 고래로부터 그 시절까지 이어진 것 아니겠는가.

a 둥글납작한 플라스틱 안에 함석 조각이 들어있고 수술은 노끈으로 바뀐 게 중학교 때 제기였다. 역시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즐겼던 놀이다.

둥글납작한 플라스틱 안에 함석 조각이 들어있고 수술은 노끈으로 바뀐 게 중학교 때 제기였다. 역시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즐겼던 놀이다. ⓒ 김용철

중학교에 진학하였다. 줄줄이 서서 보는 소변 대는 누리끼리하다. 골을 따라 조금 고여 있는 곳엔 늦가을인데도 벌이 드나든다. 제 집을 튼튼히 짓기 위해서다.

오줌을 눈 벽엔 암모니아가 말랐다 칠해졌다하니 잔뜩 얼룩이 졌다. 나프탈렌 덩어리도 일년 몇 번 일뿐 크레졸로 소독을 하여도 그 많은 숫자를 당해낼 수 없었다. 화장실이 남녀 각 하나였으니 3개 학년 함께 쓰는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화장실에서도 철저하게 서열이 정해져 있었다. 급한 아이는 산으로 내달려 볼일을 보는 경우도 있었다. 간혹 3학년이 없을 때는 1~2학년이 누가 더 오줌을 높이 싸서 올리는지 내기를 한다. 상급생이 나타나면 황급히 물건을 감추고 사라진다.

동시에 수업이 끝나면 저학년은 한쪽에 비켜서서 형들이 상석에서 누도록 기다리며 도와야 한다. 그 뿐이 아니다. 대변 칸은 어찌 냄새가 심하고 모기가 극성이었던지 겨울에도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학년별로 지정된 방이 있었지만 별 의미가 없었다.

수업 시작종이 울리면 문을 걸어 잠그고 한대 뻐끔 물고 담배연기를 날려가며 맛나게 피우고 교실로 달려오는 아이도 있었다. 초가집엔 측간이 어울리고,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변소가 맞다. 고등학교 이후엔 화장실로 바뀌었을 뿐이다.

해우소는 수업에서 해방감을 찾은 소년소녀들이 우정을 나누는 곳이었으니 사랑방이나 다름없다. 모든 고민거리를 털어놓기도 하고 배설의 기쁨을 누리기도 하니 이만큼 편한 자리가 있었을까. 냄새나는 주변으로 아이들이 끓이질 않고 모였다.

3학년 선배들이 취업이다 연합고사로 학교가 반쯤 비어간 2학년 11월 때였다. 수업을 마친 청소시간, 아이들은 청소를 하는 둥 마는 둥 끝내고 놀이를 찾게 마련이다. 맘에 맞은 애들끼리 짤짤이를 하고 동전 벽치기로 돈 따는 재미에 푹 빠진 무리가 곳곳에 보였다.

내놓으라하는 제기 선수들도 등장한다. 이때 화장실 외벽이 요긴하게 쓰인다. 바람막이뿐 아니라 선생님 감시를 피할 수도 있어 괜찮은 시설이었다. 동네에서 1등, 출신 초등학교에서 뽑히기도 하지만 반 대항이 벌어지기도 했다.

까만 교복을 입고 챙이 크고 '中' 자가 또렷한 모자에 운동화도 검정신이다. 누구나 같은 신발을 신었으니 공정한 게임이다. 각자 실력차는 극복해야할 과제다. 냄새를 조금 피해 교장 선생님 관사 부근에서 한창 무르익고 있을 무렵이었다.

"야 이놈들아 거기서 뭣들 하고 있냐? 청소 안 할 거여?"

주제, 배경, 요지, 대의를 칠판 가득 써놓고 설명 한 번 없이 읽고는 한 단원을 끝냈던 1학년 때 국어선생님이었다. 지지리도 못 가르친다며 반감을 갖고 있는 나는 퉁명스럽게 한 마디 했다.

"다 하고 노는데요 뭐."
"욘녀러새끼들. 다 끝났으면 교실에 가서 공부나 할 것이지. 제기차기가 올림픽에라도 나온다 더냐?"
"어떻게 알아요?"


어렴풋이 체육시간에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을 알고 있던 우리였다. 81년인 지난해 독일 바덴바덴에서 "셰~울 꼬레아!"가 발표될 때 온 국민이 열광하지 않았던가.

먼 훗날로 알고 있던 올림픽이 금방 다가왔다. 결국 제기차기는 정식종목이 되지 않았지만 서울에는 무척 많은 변화가 뒤따랐다.

a 남학생들이 초등학교 때 가장 즐겼던  놀이가 제기차기였다. 청소 시간을 때우는데는 최고였다.

남학생들이 초등학교 때 가장 즐겼던 놀이가 제기차기였다. 청소 시간을 때우는데는 최고였다. ⓒ 김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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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환은 서울생활을 접고 빨치산의 고장-화순에서 '백아산의 메아리'를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6, 70년대 고향 이야기와 삶의 뿌리를 캐는 글을 쓰다가 2006년 귀향하고 말았지요. 200가지 산나물을 깊은 산속에 자연 그대로 심어 산나물 천지 <산채원>을 만들고 있답니다.도시 이웃과 나누려 합니다. cafe.daum.net/sanchaewon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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