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2부 159

좌절

등록 2005.10.24 18:26수정 2005.10.24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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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따라 나서겠다는 말이냐? 심양까지는 수백리길이다. 왜 사서 고생을 하겠다는 것이냐?"

차예량은 이미 자신보다 먼저 일어나 새벽같이 짐을 꾸려들고 문간에 서 있는 계화를 보고서는 한숨을 쉬었다.


"결코 짐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제 몸 하나는 알아서 할 터이니 어서 앞장서시옵소서."

차예량을 심양까지 인도할 이는 방서방이라는 자였다. 그를 소개시켜주고 심양까지 갈 여비를 마련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임경업이었다. 하지만 임경업은 심양까지 가서 조선 포로들을 데려오겠다는 일에 대해서는 그리 탐탁찮은 반응을 보였다.

"심양까지 가서 청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뒷일을 계획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네. 사람들을 데려오는 일은 무리하지 말게나. 자칫하면 자네도 포로로 잡힐 수 있네."

차예량은 많은 부담감을 안고 심양으로 향하게 되었다. 평소 압록강을 자주 건너 장사를 해 보았다는 방서방은 심양으로 포로를 구하러 간다는 소리를 듣고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특히 계화를 보고서는 아주 정색을 할 따름이었다.

"아이고,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아시오. 하루에도 수 십 명의 조선 사람이 노비로 팔려나가는 판국이오. 그런데 아녀자가 그런 곳에 스스로 가겠다니 제 정신인 것이오?"


계화는 그저 편히 심양까지 인도해 줄 것을 당부할 뿐이었다. 새벽녘, 차예량과 방서방은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강을 건널 나룻배에 몸을 실었다.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로 심양까지 가는 길은 그래도 평탄하고 날씨도 좋을 것 같소이다. 허나 조선 사람임을 공공연히 알리면서 심양까지 갈 수는 없소. 여기서 호복(胡服 : 여기서는 청나라 옷을 뜻함)으로 갈아입읍시다."


강 너머에 도착한 방서방은 봇짐에서 옷 세벌을 꺼내었다. 옷을 펼쳐든 계화는 방서방을 다소 못마땅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계화의 손에 들린 옷이 남자의 복색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 나설 것을 미리 알았더라도 여자 옷은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외다. 그냥 입으시오."

새벽이슬을 맞으며 한참을 걸어가던 차예량 일행은 반나절 뒤에 작은 마을의 객잔에 들러 잠시 몸을 쉬어가며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논의했다.

"이 객잔은 의주와 심양을 오가는 상인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라오. 요즘은 장사가 되지 않아서 명색만 객주지 말이외다…."

방서방은 누가 들을 새라 걱정된다며 갑자기 말소리를 낮추었다.

"사실은 심양에 있는 사람들의 소식을 알려주고 몸값을 전해주는 일을 주로 한다오."
"그렇소이까? 혹시 이곳 주인과 잘 아는 사이오?

방서방의 말에 차예량은 금방 관심을 나타내었다. 방서방은 씨익 웃음을 지었다.

"물론이지요. 이 객잔의 주인은 정말 오지랖도 넓고 신망도 두텁다오. 그런데 하인만 있는 것을 보니 지금은 출타중인가 보오."

차예량이 객주의 주위를 둘러보니 작은 마을의 객잔치고는 넓은 마당에 끊임없이 사람들이 차나 술을 마시러 오고 나갔다. 손님이 뜸해지는 깊은 밤이 되고 차예량 일행만이 남아있자 객잔하인이 슬쩍 방서방에게 눈짓을 보내었다.

"주인장께서 뵙고자 하십니다."

하인의 경계하는 태도에 차예량과 계화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긴장한 표정을 짓자 방서방은 아무 일도 아니라며 그들을 안심시켰다.

"이곳을 지켜보는 눈이 있을 지도 모르니 가끔 이런 식으로 대하기도 한다오. 섭섭해 하거나 무례하다 여기진 마시오."

차예량과 계화가 안내받아 간 방안에는 한 사내가 큰 방에 촛불 하나만을 밝혀 놓은 채 칼 한 자루를 정성껏 닦고 있었다.

"비록 쓰지 않는 칼이라도 기름칠을 해 놓아야만 속이 풀리는구나."

촛불에 반짝이는 칼날은 갈 길이 먼 차예량의 마음을 섬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객잔의 주인은 그런 차예량의 마음을 알았는지 천천히 칼을 칼집에 거두고서는 어딘지 어색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 이미 의주의 일과 그대들이 온 뜻은 사람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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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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