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300회

등록 2005.11.07 08:57수정 2005.11.07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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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3 장 주정왕(周定王) 주숙(朱橚)

고태(古台)는 불구 아닌 불구였다. 그는 여덟 살 때 부모와 형제를 화재로 모두 잃었다. 차라리 같이 죽는 것이 나았을지 몰랐다. 살아남은 그에게는 부모형제를 앗아간 끔찍한 화재의 천형(天刑)이 낙인찍혔던 것이다.


얼굴은 형체만 남았고 화상의 흔적은 그가 사람인지조차 의심받을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어렸을 때는 왜 사람들이 자신을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하고 때리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을 확인했을 때 그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 못하는 이유를 알았다.

그는 어둠이란 것이 없으면 사람 사는 근처에 가지 못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살았다. 살기 위해서 음식찌꺼기를 주워 먹고 살았고, 그 음식찌꺼기의 경쟁자는 사람이 아닌 고양이나 쥐, 개라는 사실을 알았다.

(구더기 같은 삶이었어....)

그가 비로소 사람이 먹는 음식다운 음식을 먹기 시작했을 때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 사람이 아닌 버러지같은 삶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그가 자고 먹는 것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버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구더기 같은 삶 덕분이라 생각했다.

그는 음식찌꺼기의 경쟁자를 물리치기 위하여 개나 고양이와 싸우는 것보다는 친구가 되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상을 입어 비틀린 흉측한 그의 몸에 개 이빨의 상처가 몇 번 덧씌어지고 나서 본능적으로 터득한 생존방법이었다. 그리고 그는 먹기 위하여 개나 고양이를 친구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사람과는 아무리 친구가 되려고 해도 친구가 될 수 없었지만 개나 고양이는 자신의 흉측한 외모를 탓하지 않고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의 덩치가 개나 고양이를 한주먹으로 때려죽일 수 있을 정도로 커졌을 때 그는 개나 고양이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재주를 가지게 되었다. 그 재주는 누군가의 눈에 들어 여전히 사람은 친구로 사귈 수 없었지만 자는 것과 먹는 것을 해결해 주었다.

비록 닭이나 오리, 개, 돼지 등을 키우는 하찮은 일을 맡고 있었지만, 주인은 기초적인 무공도 가르쳐 주었다. 날랜 몸 덕으로 경신술(輕身術)에도 익숙해졌고, 귀식법(龜息法)이 왜 필요한지도 모르고 익혀야 했다.


(고마운 분이시지. 이제 나는 그 분의 은혜를 갚을 때가 되었다.)

그는 닷새 전 주인의 부름을 받았다. 그 분은 어려운 부탁을 했고, 그는 쾌히 하겠다고 했다. 주인은 자신의 목숨까지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일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오십 줄에 접어들고 있는 지금 더 산다고 해서 풍요로운 삶이 보장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몸집이 작고 빠른 네 마리의 개를 골랐다. 그 개들은 자신의 자식과 마찬가지로 애지중지하는 것이었는데 너무나 영특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반드시 해 줄 수 있는 개들이었다. 그는 실수하지 않기 위하여 이틀 동안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도록 훈련시켰다.

그러고는 사흘 전 미리 준비된 절벽의 동굴 안으로 네 마리의 개들과 기어 들어와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인지 낮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그에게는 밝음보다는 어둠이 더 친근했다. 사람에 둘러싸여 있는 것보다 이렇듯 어둠 속에서 홀로 있는 것이 더 아늑했다.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거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세 번 들은 후에 움직이면 된다.)

막아 놓은 동굴 입구 주위로 어제부터 인기척이 들렸다. 누군가가 주위를 샅샅이 뒤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이 감지되는 것을 보면 주인이 말했던 때, 자신이 움직여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발각될 염려는 없었다. 입구가 막힌 동굴 안에서 귀식법으로 최소한의 호흡만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사람은 이 중원에 존재하지 않았다. 데리고 들어 온 네 마리의 개 역시 먹이에 약을 탔기 때문에 하루에 한번 정도 깨어나는 상황이었다.

(........!)

그 때였다. 주위에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진동은 잠시 후 점차 또렷하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계곡 안으로 많은 무리들이 몰려들어 들어오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움직임에는 말발굽 소리도 섞여 있었다. 그들은 무서운 속도로 계곡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몸을 웅크리고 있는 동굴을 지나치고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 귀식법을 풀지 않았다. 주인은 분명 세 번이 지난 다음에 움직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는 아직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
어느새 해는 제 모습을 완전히 갖춘 채 멀리 보이는 구릉 위로 떠올라 있었다. 떠난 지 사년 만이었다. 절망을 안고 떠날 때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주위의 풍경은 변해 있었다. 황량하던 벌판에는 여러 가지 작물이 심어져 있었다. 농사라도 짓고 있는 것일까? 그는 느릿하게 걸으며 멀리 보이는 낯선 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신이 머물던 초옥은 그대로 있었지만 그 옆으로 목조로 만든 듯 한 두 채의 가옥이 지어져 있었고, 왼쪽으로 삼십여 장 떨어진 곳에 농가로 보이는 이십여 채의 가옥이 들어서 있었다.

(누군가 들어와 살고 있는 것일까?)

떠날 때만 하더라도 이곳은 인적이 없는 황량한 곳이었다. 사냥꾼이나 약초 캐는 사람들도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오직 사부와 사부가 데리고 온 사람들이 고작이었다.

헌데 이십여 채 정도로 보이는 가옥에서는 군데군데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아 분명 사람이 살고 있는 듯 했다. 여러 종류의 채소와 작물들이 심어져 있는 주위의 밭 역시 농부들의 정성어린 손길이 닿지 않았다면 저리도 고르게 자라고 있지 않을 터였다.

그리 멀지 않은 늪지에서 반 시진 전까지 사투(死鬪)가 벌어진 상황과는 맞지 않게 너무나 조용하고 한가로운 풍경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삼층으로 된 두 채의 목조가옥은 의외로 큰 루(樓)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팔각(八角)의 지붕과 창의 형태는 매우 정성들여 지은 것으로 생각되었고, 가까이 가자 부속 목조가옥도 제법 몇 채가 더 지어져 딸려 있었다.

(사부는 아예 이곳에 살기로 작정하고 터를 잡은 것일까?)

그의 신분으로 보아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농가로 보이는 이십여 채의 가옥 쪽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이 있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는 다른 곳은 개의치 않고 자신이 머물고 있었던 낡고 초라한 초옥 쪽으로 다가가 서슴없이 문을 열었다.

끼이익---

낡고 헐렁한 문짝이 덜렁거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질렀다. 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손바닥 두 개 정도 크기의 창문 하나만이 유일하게 빛이 들어오게 되어 있어 밖에서 들어 온 사람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안을 확연하게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초옥의 안이 변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짙은 어둠에 덮여 있다 하더라도 그에게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다. 초옥 안은 단순하여 거치적거릴 것도 없었다. 가구라야 안쪽으로 침상이 놓여있고, 그 앞쪽으로 나무를 깎아 만든 탁자와 의자 서너 개가 있을 것이었다.

“.........!”

하지만 그는 실내로 들어서는 순간 향긋한 다향(茶香)이 코로 스며들고, 몇 사람이 탁자 주위에 앉아 있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익숙한, 그가 살아오면서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 절대 잊지 못할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다녀왔느냐?”

금포의 중년인, 바로 사부의 목소리였다. 마치 잠시 외출했다가 돌아 온 자식이나 제자를 보고 하는 정감 어린 말투였다.

“그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전하(殿下).”

담천의는 정중하게 절을 올렸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자신을 키워준 사람이었고, 많은 것을 베풀어 준 사람이었다. 더구나 이미 우교로부터 사부가 누군지 알게 된 터. 몇 년이 지났을 뿐이었지만 사부는 눈에 띠게 나이를 먹은 것 같았다.

언제나 곱게 빚어 한 올 흐트러짐이 없던 머리는 이미 서리가 내린 듯 허옇게 변해 있었고, 팽팽하고 각진 얼굴은 어느새 매끄러운 턱 선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몸도 약간 불어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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