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승의 수하들이 메고 왔다가 사당 안으로 던진 관은 뚜껑이 열려있었다. 관은 이미 비어 있었는데 강명이 들어오자 좌우산인이 한쪽 구석에서 한 인물을 부축해 강명의 앞으로 데려왔다. 그는 매우 초췌한 모습의 오독공자 남화우였다. 아마 관 안에 들어있던 사람이 그였던 모양이었다.
“남화우… 오공자를 뵈오. 이런 추태를 보여드려 심히 죄송스럽소.”
입술이 메말라 터지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것을 보아 심한 고초를 겪은 것 같았다. 언제나 깔끔했던 의복은 피에 절어 말라붙어 있었고, 이십대로 보이던 피부는 주름이 잡혀 본래의 나이를 짐작케 했다.
“고생이 심했나 보군.”
강명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남화우는 사부의 수하다. 사부의 수하를 거두고 보살피는 일 또한 제자가 할 일. 정보가 혼란을 가중시키지 않았다면 좀 더 빨리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운학은?”
“정공자는 육능풍과 진독수가 철혈보로 데려가는 것 같았소.”
“육능풍이 철혈보로 되돌아갔다?”
강명은 이상한 듯 뇌까렸다. 육능풍은 왜 갑자기 방향을 돌려 철혈보로 돌아갔을까? 철혈보에 급한 일이 생긴 것일까? 육능풍의 입장에서는 연동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직접 확인하지 않고 돌아갔음은 철혈보에 뭔가 일이 터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반당과 원월만도 좌승을 믿었을 수도 있었다.
“헌데 사부께서는 어찌된 일인가?”
“섭노야께서는 이곳을 나오시자마자 정공자와 금존불을 불러 뭔가 상의하시는 것 같았소. 그 내막이야 속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뒤로 뵙지 못했소.”
도대체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부에게 무슨 일이 있기에 일행에서 빠진 것일까? 그때였다. 남화우의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 연동의 존재를 철혈보 작자들에게 누설한 것은 네놈이렸다.”
매서운 목소리였고, 심하게 추궁하는 듯한 말투였다. 남화우가 고개를 돌렸다. 좌측의 나한상을 돌아 나오는 세 명의 여인이 보이자 남화우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교도 남화우… 천사장(天司長)을 뵈오이다.”
바로 넷째인 유항이었다. 백련교의 모든 의식을 주관해 거행하는 제사장(祭司長)으로 교도들에게는 천사장으로 불린다. 그녀의 옆에 있는 두 여인 역시 사형제들을 보필하기 위해 딸리는 좌우산인이었다.
“사저…!”
강명이 가볍게 포권을 취하며 예를 취했다. 그러자 남화우를 바라보던 서릿발 같은 표정을 거두며 강명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고생이 많구나… 헌데 사제는 언제 보아도 놀라워. 사제의 검은 이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더구나.”
이미 반당과의 혈투도 지켜보았다는 의미였다. 다만 일찍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을 뿐. 완벽하게 연동을 수중에 넣은 유항이 연동입구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모를 리는 없는 일이었다. 아마 강명이 이곳에 도착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까지 알고 있었을 터였다.
“과찬이시오.”
“아니야…. 하여간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지.”
그러더니 시선을 다시 암화우 쪽으로 돌렸는데 부드러운 미소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금새 독기가 풀풀 날리는 표정이었다. 한 사람의 표정이 어떻게 이리 순식간에 변화할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연동의 존재는 절대 알려서는 안 될 기밀 중의 기밀이다. 네 스스로 이곳까지 저들을 안내한 것이 맞으렸다!”
남화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물론 연동의 존재는 외부 인물들에게, 특히 적에게는 알려서는 안 될 기밀임은 분명하였다.
“그렇소. 속하가 누설했소. 하지만….”
이미 남화우는 불만스런 기색과 함께 체념한 표정이었다.
“변명하고자 하는 것이냐?”
“크흐흣….”
남화우는 실소를 터트렸다. 변명이라면 변명일 것이다. 하지만 어찌 이리도 모질게 다그치는가?
“기밀을 누설했으니 교리(敎理)에 따라 처벌받는 것은 당연히 감수할 수 있소. 하지만 이 하찮은 목숨으로 지킬 기밀이었으면 지켰을 것이오. 아홉째 정공자의 목숨보다는 차라리 기밀을 누설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소.”
“운학의 핑계를 대는 것이냐? 운학이라면 자신의 목숨을 잃는다 해도 발설하지 않았을 것이야.”
“그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소. 다만 수하된 도리였다고 생각하시오. 설사 사지가 찢기 는 형(刑)을 받는다 해도 더 이상 변명하지 않겠소.”
더 이상 변명할 이유도 없었다. 차라리 죽었으면 나았을 터였다. 적에게 생포되었을 때 스스로 자진하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흥… 이제는 네 놈이 항명까지 하려는 게구나.”
남화우가 이미 체념한 상태에서 자신이 할 말을 다하자 유항의 얼굴에서 새파란 살기가 흘러나왔다. 당장이라도 손을 쓸 태세였다.
“사저… 잠시 노기를 거두시오. 본 교에 누를 끼쳤다면 처벌하는 것은 당연하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나중에 해도 되지 않겠소?”
보다 못한 강명이 나서자 유항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강명을 쳐다보았다.
“사제…!”
“일단은 소제가 데리고 있겠소. 걷지도 못하는 상태이니 일단 상세부터 치료하는 것이 좋겠소. 또한 아무리 죽을 죄를 지었더라도 한 번의 기회는 줘야 하지 않겠소?”
강명의 말에 유항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몇 번의 변화를 일으켰다. 갈등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강명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유항이었다. 더구나 백련교 에서는 사적인 처벌은 금지되어 있다.
강명의 사부인 섭장천이 데리고 있던 자이니만큼 지금 섭장천이 없는 상황에서 강명이 데리고 있겠다는 말 또한 틀린 것은 아니다. 유항은 얼른 표정을 고치며 배시시 웃었다.
“사제의 뜻이 정 그렇다면야… 하지만 저 자의 죄를 사할 수는 없어.”
“소제가 책임지겠소.”
강명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유항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이런 일은 언제건 양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 중요한 문제는 강명이 천마곡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그에게는 맡길 임무가 있었다.
“나와 이야기나 할까?”
“소제 역시 궁금한 것이 많소.”
지금 강명의 전력이라면 충분히 철혈보를 중원에서 사라지게 할 수 있었다. 이미 자신이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사내는 강명이 할 일을 결정해 놓았다. 다만 그 일을 어떻게 설득해 움직이게 만드느냐가 문제였다. 유항에게 말을 하고는 강명은 고개를 돌려 좌우산인을 보고 말했다.
“상세를 치료해 주도록….”
“존명.”
좌우산인이 대답하자 강명은 유항을 따라 유항이 모습을 보였던 나한상의 뒤로 들어갔다. 어쩌면 그가 가진 여러 가지 궁금증을 넷째사저가 풀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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