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덮인 섬진강,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겨울이면 더 찬란함을 발하는 섬진강 이야기

등록 2005.12.07 10:31수정 2005.12.07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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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눈 덮인 섬진강, 호곡 줄나루.

눈 덮인 섬진강, 호곡 줄나루. ⓒ 최성민

섬진강에 모처럼 많은 눈이 내렸다. 지난 4일 전국적으로 첫 눈이 많이 내렸듯이, 지리산 자락 섬진강 물줄기에 안겨 있는 전남 곡성에도 전에 볼 수 없었던 엄청나게 많은 '첫 눈'이 내렸다. 섬진강변길에 눈이 쌓이는 것을 보기가 쉽지 않은 일인데 지금 이곳은 온통 순백의 세상으로 변해 있다.

순백의 섬진강은 빌딩숲이 눈에 덮인 도시의 풍경과는 아주 다르다. 여전히 솨아~ 소리를 지르며 눈을 솜이불처럼 두르고 흐르는 강줄기의 모습에서는 영하의 날씨지만 온기가 느껴진다. 추위 속에서도 격하지 않게, 가늘게 그리고 부지런히 흐른다.


a 호곡 줄나루. 섬진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줄나루인데, 지금은 '유일한 줄나루'로 남아 있다.

호곡 줄나루. 섬진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줄나루인데, 지금은 '유일한 줄나루'로 남아 있다. ⓒ 최성민

그 강물 위엔 청둥오리들이 겨우살이터를 차렸다. 섬진강에서 가장 풍치가 좋다는 곡성 오곡면 오지리-고달면 호곡리~압록 사이, 그 가운데서도 호곡나루 아래 물살이 좀 빠른 대목에 해마다 청둥오리들이 떼지어 날아온다.

거기에 쏘가리 등 물고기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 대목에는 가끔 왜가리와 물수리 등이 날갯짓을 해 보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터줏대감 행세를 하는 청둥오리떼의 텃새를 감당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a 섬진강 호곡 줄나루 옆에 겨우살이터를 차린 청둥오리떼.

섬진강 호곡 줄나루 옆에 겨우살이터를 차린 청둥오리떼. ⓒ 최성민

청둥오리들은 대여섯 모임으로 나뉘어 옮겨 다닌다. 하나의 모임은 30~50마리, 목에 암록색 목도리를 두른 수컷들이 3분의 2, 나머지는 체구가 작고 몸 전체가 갈색인 암컷들이다.

이들은 아래로 흐르는 강물을 역류해 오르면서 물질을 하다간 간혹 강물에 그냥 몸을 맡기고 떠내려가는 등 온갖 수중발레를 하면서 먹이를 구하거나 놀고 있다. 해마다 이 청둥오리떼의 귀향으로 겨울 섬진강은 황량함을 면하곤 한다. 아니 황량하지 않다기 보다는 봄 여름 가을에 못지 않은 활력이 넘쳐나게 되는 것이다.

a 청둥오리들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섬진강 한 대목에서 겨우살이 대목을 누리고 있다.

청둥오리들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섬진강 한 대목에서 겨우살이 대목을 누리고 있다. ⓒ 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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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성민

겨울 섬진강 순백의 수채화에 시정을 곁들여 주는 것이 호곡나룻배이다. 호곡리 사람들이 강건너 곡성읍에 나가도록 태워 주는 이 배는 지금 눈을 듬뿍 뒤집어쓰고 있다. 어제는 강변에 닿아 있더니 오늘은 강물 한가운데에 밀려가 떠 있다. 춥고 미끄러워 위험하므로 배를 타지 말라고 누군가가 애써 강 한가운데로 밀어 놓았나 보다.


이 호곡 줄나룻배를 보면 나룻가 호곡매운탕집 두 손녀 아이들이 생각난다.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인 듯한 두 아이는 날마다 아침엔 엄마가 줄을 당겨 주는 나룻배로 강을 건넌다. 그리고 하교길엔 강건너에서 "엄마, 나 왔어!~" 하거나 "할머니 나 왔어~" 하다가 기척이 없으면 지네들끼리 줄을 당겨 건너온다.

곡성은 전국 유일의 '통폐합 시범특구'로 모든 초중등학교를 군내 세 지역(곡성읍, 석곡, 옥과)에 최신식 시설의 학교를 지어 통합하여 스쿨버스로 통학 시킨다. 호곡매운탕집 딸네들은 유일하게 줄나룻배를 건너 버스를 탄다.


흰 눈으로 뒤덮인 강변길을 걸어, 증기기관차(올해 초 곡성의 명물로 관광증기기관차가 등장해 옛 곡성역~가정마을 사이를 다닌다)가 김 뿜어대는 강언덕을 바라보며, 솨아~ 흘러내리는 강물위로 나룻배를 저어 최신식 버스를 타고 읍내 학교를 가는 이 아이들의 어릴 적 추억이 벌써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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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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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성민

강나루 언덕 논둑엔 서너 그루의 산수유나무가 눈 속에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며칠 전 호곡리 어떤 할머니가 멍석을 깔고 간짓대로 산수유나무를 두들기고 있었는데 하도 많이 열린 산수유열매를 절반도 따지 못했다.

이제 남은 것은 눈과 겨울 햇볕에 시달리고 말라붙어 늦겨울이나 춘궁기 무렵 산새들의 구차한 먹이가 될 것이다. 산수유나무엔 그 임자없는 열매들 옆에서 아주 작은 새 꽃봉오리들이 움을 내밀고 있다.

a 섬진강변 나뭇가지에 남은 채 눈을 맞은 산수유 열매.

섬진강변 나뭇가지에 남은 채 눈을 맞은 산수유 열매. ⓒ 최성민

섬진강변 지리산 자락에서 풍성하게 나는 토종 산과실 중엔 '정금'이라는 것도 있다. 머루알만한 크기로 열려 가을에 검보라색으로 익는 정금은 따다가 술을 담그거나 설탕에 버무려 진액을 뽑아낸다.

눈덮인 섬진강을 담고 점심때쯤 집에 돌아와 진보라 색깔이 유난히 예쁜 정금주나 정금녹인 물 한 잔을 마시면 정금의 새큼상큼한 기운에 산의 정기가 서려 있다. 곡성 섬진강 자락의 생명 기운은 한 겨울 정금술과 정금물에 살아 있는 것이다.

a 정금술.

정금술. ⓒ 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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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창간발의인, 문화부 기자, 여론매체부장, 논설위원 역임. 곡성 산절로야생다원 대표.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 소장. 철학박사(서울대 교육학과,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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