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정통무협 단장기 325회

등록 2005.12.12 08:37수정 2005.12.12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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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자신의 기억력이 나빠도 세 번씩이나 만난 여자를 몰라 볼 수는 없다. 더구나 그는 기억력이 나쁜 사람이 아니다. 이 여자는 지금 자신과 농담이라도 하는 것일까?

“당신이 바보인 것은 분명해요. 나에 대해 굳이 알 필요가 없는데도 이 일을 매우 중요하다고 여기니까요.”


몽화의 말은 구양휘를 자극하고 있었다. 하지만 구양휘는 오히려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느긋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하면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갈까 궁리 중인가? 하지만 어떠한 말로도 안 될 거야.”

구양휘가 조금도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몽화는 나직하게 탄식을 터트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좋아요. 당신은 이 안의 말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차단하도록 해요. 나는 전음을 펼칠지 몰라요. 그 정도 수고는 할 수 있겠죠?”

구양휘가 말한 대로 구양휘는 이곳에 올 때 고의로 발걸음 소리를 크게 했다. 구양휘가 이곳에 왔다는 것을 구양가의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을 것이고, 반드시 구양가의 사람들만 주위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있을 터였다.


“물론… 하지만 잔꾀로 나를 혼란스럽게 하거나 속일 생각이라면 일찌감치 버리는 것이 좋다.”

구양휘는 전신의 공력을 서서히 끌어올렸다. 여자라고 따로 임시천막을 마련해 준 것이지만 그 크기는 매우 작아 침상 세 개 정도 들어갈 정도여서 굳이 많은 공력을 소모할 필요도 없었다. 몽화가 말을 이었다.


“나는 이곳에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지고 들어왔어요.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당신과 반드시 함께 있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팽가주께 부탁을 드린 거예요.”

“반드시 나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래요. 나는 같은 조직에 몸담고 있었던 자나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 모종의 인물들에 의해 쫓기고 있어요. 천하의 구양대협께 몸을 의탁하면 가장 안전할 수가 있죠. 더구나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고 상대의 영역 안에 있다면 더욱 안전하다고 생각했어요.”

“너를 쫓는 자들이 이곳 천마곡에 있다는 말인가? 네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이길래 백련교도와 구마의 후인들이 너를 쫓는다는 것이지?”

아직도 구양휘의 말에는 비꼬는 듯한 가시가 돋혀 있었다. 말은 들어주고 있지만 영 미덥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당신은 정말 바보로군요. 내 말이 듣기 싫다면 듣지 않아도 돼요. 배배 꼬인 당신 심사를 나에게 풀려고 하지도 말고요.”

몽화가 톡 쏘았다. 구양휘의 비꼬임에 몽화 역시 기분이 상한 듯 했다. 사실 어처구니없는 건 구양휘도 마찬가지였다. 내력이 불분명한 여인네가 자신을 아주 바보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단 참았다.

“옛 성현의 말씀이 틀리지 않군.”

여자나 소인배와 다투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 그 말을 못 알아들을 리 없는 몽화가 코웃음을 쳤다.

“당신도 군자는 아니에요.”

구양휘에게 이렇게 대놓고 말을 하는 사람은 드물다.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라면 분명 이런 말은 싸우자고 하는 것 외에는 다른 뜻이 있을 리 없다. 몽화는 구양휘가 무어라 하기 전에 먼저 말을 이었다.

“나는 분명 내가 속한 조직의 인물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모종의 인물들에게 쫓긴다고 했지 백련교도와 구마의 후인들에게 쫓긴다고 하지 않았어요.”

“등하불명이라고 하지 않았나?”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지고 당신과 합류하고자 했어요. 바로 그것이 확인할 세 가지 중 하나에요. 나를 쫓는 자들은 분명 이곳 천마곡의 세력과 연관이 있어요. 하지만 전적으로 그들과 한패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었어요. 만약 그들 중 일부가 천마곡의 백련교도나 구마의 후예 들 틈에서 발견된다면 바로 확인이 되겠죠.”

“그렇다면 너는 어디에 속해 있지?”

“천지회(天地會)…!”

“천지회…? 천지회가 백련교도들과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이 정도까지 말해주었으면 구양휘는 몽화가 누구인지 좀 더 깊이 생각해 봤어야 했다. 하지만 만박거사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여유가 없었다. 더구나 유곡이 몽화일 것이란 생각은 애초부터 할 수 없는 가정이었다.

“일부인지… 전부인지 확인해야 해요. 모용화천이 천마곡까지 장악하고 있는지 말이죠.”

“끄응….”

구양휘는 신음소리를 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여자다. 천지회 회주 중 하나인 모용화천까지 언급하는 것을 보니 하찮은 여자가 아니다. 자신도 접근하지 못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또 한 가지 확인할 일은 모용가와 모용화천이 관련이 있느냐는 것이에요. 나는 당신에게 모용가의 가주인 모용화궁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해 달라고 부탁하려 했어요. 이왕 말이 나왔으니 지금 부탁을 하죠. 관찰력과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 두 명만 골라 모용화궁의 움직임을 세심한 데까지 지켜보라고 하세요. 만약 모용화궁이 모용화천과 연관이 있고, 이곳 천마곡과도 연관이 있다면 우리는 절대 이곳을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없을 거예요.”

이건 거의 명령조다. 몽화를 다그치려 찾아 온 구양휘의 목적은 어디가고 상황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진심이 담겨 있어 이제는 선뜻 비꼬거나 거절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제마척사맹의 일부가, 수뇌급 회의에도 참석하고 있는 모용화궁이 만약 적과 내동하는 사이라면 이것은 정말 큰 문제였다. 이건 아예 적에게 모든 것을 내보이고 안에서 자멸할 수 있는 중대한 일이었다.

“일단 그렇게 하지.”

구양휘는 고개를 끄떡였다. 여자를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천지회의 회주 중 한 명이 모용화천이고, 그가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말은 이미 들은 터였다.

“또 한 가지 확인할 일은 무엇이지?”

“그건 차차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거예요. 지금은 궁금해도 참아두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지금 말한 것이 다인가? 반드시 나와 함께 합류할 이유로는 부족한 것 같군.”

구양휘의 지적은 예리했다. 쫓기는 자를 피하기 위해서라면 구양휘가 아니더라도 다른 인물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굳이 위험한 천마곡 안으로 들어올 이유도 없었다. 또한 모용화궁을 관찰하는 문제도 반드시 구양휘가 아니더라도 가능했다.

“이유는 충분해요. 당신을 믿을 수 있어서죠. 절대 모종의 세력과 결탁하지 않을 사람을 꼽아보다 보니 몇 사람 되지 않더군요. 그 중 당신이 가장 확실하더군요. 더구나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어요.”

“네가 만나려는 한 사람을 만나는데 왜 내가 필요하지?”

“내가 만나려는 사람은 반드시 당신을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에요.”

“아직 만나지 못한 모양이군.”

“그래요. 하지만 그는 반드시 이곳 당신에게 오리라 믿어요.”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되는 모양이지만 아직 내게 오지 못한 사람이라면 오기 힘들겠군. 천마곡의 입구가 막혔어.”

“하지만 그는 올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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