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리즈의 2회 및 3회 기사에서 중-일 패권경쟁을 부채질하는 주요 심리적 요인들 중에 (1)과거에 일본만큼 중국을 침탈한 나라가 없다는 점 (2)한국·중국 등의 항일전쟁(중일전쟁)이 서양 중심의 제2차 세계대전에 가려 제대로 결말을 내지 못했다는 점이 있음을 언급하였다.
이번 기사에서는 미국의 원폭 투하가 항일전쟁을 왜곡시켰음은 물론 전후(戰後) 동북아질서를 전체적으로 왜곡시켰다는 점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왜곡은 모순을 가져오고 모순은 그 모순의 종결을 위한 또 다른 투쟁을 낳는다. 원폭 투하로 인해 잉태된 동북아질서의 왜곡이 결과적으로는 또 한 번의 중-일 패권경쟁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 이번 기사의 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기자 주>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盧溝橋, 노구교) 사건으로 촉발된 항일전쟁(중일전쟁)의 국면은 중국 공산당군과 국민당군의 합작으로 전개됐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적후전장(敵後戰場)에서는 공산당군이 주도하고 정면전장(正面戰場)에서는 국민당이 주도하는 가운데에 항일전쟁이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시기에 독자적인 항일독립전쟁을 전개하던 한국 민중의 대중(對中) 협력이 중국인들의 항일전쟁에 기여한 성과 역시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논의의 편의를 위해 이 글에서는 한국 민중의 역할에 관한 언급은 생략하고 중국 민중의 투쟁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항일전쟁 초기에 일본은 '속전속결을 통해 3개월 정도면 충분히 중국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1938년 3월 타이얼주앙 전투에서 국·공 양군(兩軍)에게 패배함으로써 이러한 계산이 오판으로 판명되기는 했지만 적어도 1938년까지는 일본이 국면을 주도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1938년 5월에 일본군은 화중(華中)과 화북(華北)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쉬조우를 점령하였고 같은 해 10월에는 우한과 광조우를 점령함으로써 중국의 주요 거점을 차지하게 되었다.
외형상으로는 일본군이 중국의 주요 거점을 점령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것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일본군이 점령한 곳은 중국의 대도시였을 뿐이며 광대한 농촌지역에서는 일본군이 공산당 주도의 게릴라 부대들에게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군대는 일본의 포병이나 기계화부대가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언덕이나 산악에 진을 치고 일본군에 대항했다. 도시 이외의 지역에 거점을 둔 중국 군대의 격렬한 공격에 밀려 일본군 100만 대군은 중국 본토에서 발이 묶여 패색이 짙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는 기본적으로 1944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런데 불리한 상황에 놓인 일본은 엉뚱하게도 진주만 기습(1941년)이라는 결정적 자충수를 두게 되었다. 중국 및 만주 지역에서 한·중 양국 민중의 격렬한 저항에 밀려 패색이 짙어지고 있은 상황에서 미국이라는 또 하나의 적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게 된 배경은 이러하다. 제2회 기사인 '후발주자 일본이 중국을 더 많이 침탈했다'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시기에 일본의 중국침탈은 한층 더 강화되고 있었다. 이는 자연히 미국·영국 등이 중국 내에 갖고 있던 경제적 권익을 침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이 중국 내에서 자국의 경제적 권익을 침해하고 있다는 판단을 한 미국은 1939년 7월에 미일통상조약의 파기를 통고한 뒤, 요즘 식으로 하면 대일경제제재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19세기말 이래 나타난 미국의 행태를 볼 때에, 양측이 군사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그중 어느 한 쪽을 지지하고 나섰다면, 미국의 지지를 받는 쪽은 이미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청일전쟁이 벌어지기 직전에 조선정부가 미국의 개입을 '그토록 애타게'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끝내 조선의 요구를 외면한 것은 '청나라와 일본 중에서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인지 아직은 속단할 수 없다'는 자체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중국이 일본에 패배하고 있었다면 미국이 중국 편을 들 리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전쟁보급물자의 대부분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던 일본에게 있어서, 이 같은 미국의 경제제재는 엎친 데 덮치는 격이었다. 전장(戰場)인 중국 무대에서 밀리고 있던 상황에서 후방의 보급마저 끊어질 판국에 놓인 것이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일본은 소위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우며 동남아 침략을 통해 활로를 모색했고, 이에 맞서 미국도 경제적 압박의 수위를 한층 더 강화하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일본이 진주만 기습을 감행한 것은 일본군의 보급선을 조여 오는 미국에 불의의 일격을 가함으로써 전쟁국면을 전환해 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진주만 기습으로 일본이 얻은 것은 '또 다른 적의 출현'에 불과하였으며 그 덕분에 중국은 미국과의 연대를 통해 국제적 고립을 탈피할 수 있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1945년이 되면서 전쟁은 막바지 국면에 접어들었다. 5월에는 소련군이 베를린을 공격했으며 6월에는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팔로군과 신사군의 반격이 개시되었다. 그래서 중국 본토에서는 1945년 봄에 북쪽의 네이멍구로부터 남쪽의 하이난다오에 이르기까지 19개의 공산당 해방구가 성립되었다.
이와 같이 중국 및 만주 지역에서 중국 군대가 한국 민중의 협력을 얻어 일본군을 몰아내고 있던 상황에서 1945년 8월에 두 방의 원폭이 일본에 투하되어 전쟁은 급속히 종결 국면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하고 미국의 공로와 위력이 과대평가되는 속에서, 이후 동북아에는 미국의 핵우산이 드리워지게 되었으며 이는 동북아 지역에 왜곡과 모순을 잉태하는 핵심 원인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간략하게나마 살펴본 바와 같이 중국 및 만주 지역에서는 한국 민중의 협력 속에 중국 군대가 일본군을 서서히 몰아내는 한편 미국은 일본의 보급선을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 이처럼 한·중 양국 민중과 미국의 국제적 연대 속에 대일(對日) 승리를 얻은 것이라면 전후의 국제질서에서도 각 행위자가 응분의 지분을 가지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축구 경기에서 0-2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A 선수가 첫 번째 골을, B 선수가 두 번째 골을, C 선수가 세 번째 골을 넣었다면 물론 세 번째 선수의 득점이 결승득점이기는 하지만 팀 승리에 기여한 것은 득점을 한 3명을 포함하여 11명 모두라고 보아야 한다. 11명 전체의 역할이 공정하게 평가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전후의 국제질서에서는 세 번째 선수의 골인 미국의 원폭 투하만 과대평가되고 앞의 두 선수인 한·중 양국의 역할은 상대적으로 왜소한 평가를 받아 왔다.
사실 미국의 원폭 투하가 전쟁의 국면을 바꾸었다기보다는, 패색이 짙어 가는 일본의 심리적 버팀목을 최종적으로 부러뜨리는 역할을 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일본군은 미국이 아닌 한·중 양국과의 전쟁에서 약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폭 투하는 일본 자신의 패배를 재차 확인시켜 주는 심리적 효과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쟁에 대한 불공정한 평가는 현실 국제관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패전국인 일본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신속히 부활한 반면 진정한 승전국이라 할 수 있는 한·중 양국은 전후의 과실(果實)을 획득하기는 커녕 도리어 민족이 분단되는 기이한 결과가 생기고 만 것이다.
어찌 보면 한·중 두 민족의 역량이 그만큼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일 수도 있지만 이 같은 왜곡의 가장 본질적인 원인은 미국의 능력 아니 핵무기의 능력이 과대평가되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한·중 양국에게 군사적으로 밀리고 있던 일본이 미국에게 무조건 항복한 것이나 실질적인 전쟁 주역인 한·중 양국이 미국 앞에서 주춤거린 것이나, 소련이 38선 분단이라는 미국의 요구를 쉽사리 수용한 것 등은 모두 핵무기의 능력에 대한 과대평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미국이 히로시마·나가사키에 투하한 2방의 원자폭탄이 수많은 인명피해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것이 일본군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도 아니었고, 또 그 이후에도 그렇게 되기는 힘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미국이 마음만 먹으면 그 후에도 얼마든지 원자폭탄을 계속 투하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할지 모르지만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으로 볼 때에 그러한 반론은 타당하게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첫째, 인간의 행위를 견제하는 최대 요인은 '인간적'이라는 기준이다. 인간이 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동료 인간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 만약 인간이 하는 행위가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이라면 그러한 행위는 동료 인간들의 견제와 저항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당시 전쟁에 참가한 미국의 기본적 의도는 국제사회(인간사회)에서의 영향력을 높이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미국 스스로도 핵무기의 무한정 사용을 통해 인간사회를 모조리 파멸시키는 행동을 할 리가 없는 것이고 또 그렇게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독재정권이 그 어떤 물리력을 동원한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붕괴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적'이라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은 정권은 동료 인간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핵무기보다 더 위력적인 '첨단무기'는 바로 '인간의 힘'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정치는 본래 심리적 방식을 통해 다른 인간들에 대한 지배를 획득하려는 것이다. 전쟁도 정치의 연장이라고 볼 때에, 미국이 그 당시 전쟁에 참가한 동기는 다른 인간들에 대한 지배를 확장하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지배를 목적으로 하면서 인간을 완전 파멸로 몰고 갈 핵무기를 무한정 사용하는 것은 분명 자가당착일 것이다.
셋째, 전쟁은 본래 민중과 토지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다. 정치집단이 전쟁을 통해 민중과 토지를 획득하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최대 수입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류 대부분을 파멸시키고 또 지구 전체를 황폐화시키며 결국에는 자기 자신까지 파멸시킬 핵무기를 무한정 사용할 어리석은 권력자가 과연 존재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핵무기는 본래 억지력을 갖는 데 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넷째, 당시 미국의 핵능력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절대적 우위에 있었다고 볼 수 없다. 미국은 1941년 12월 6일부터 소위 맨하튼계획(Manhattan Project)이라는 핵무기 개발계획을 추진하였고, 공포의 살상무기는 ‘불과’ 4년도 안 되어 완성되었다. 이것은 당시의 기술수준으로도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어느 나라든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핵무기를 만들 수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점은 미국의 원폭 투하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소련·중국 등도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것으로 보아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개발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웬만한 나라도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미국이 핵능력에서 절대적 우위에 있었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당시 미국의 우위는 상대적 우위에 그쳤던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살펴볼 때 미국이 그 당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항일전쟁이나 제2차 대전에서 미국의 원폭 투하는 일본의 패망을 가져온 본질적 요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국의 핵능력 아니 핵무기 자체가 과대평가되는 바람에 한국·중국·소련·일본 등이 미국 앞에서 주춤거리게 되었고, 이는 사실상의 승전국이라 할 수 있는 한국·중국의 분단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지금 동북아 민족들이 겪고 있는 분단과 그 분단으로 인한 모순의 원인은 바로 미국의 원폭투하와 미국의 핵우산에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오늘날 동북아의 최대 모순은 바로 미국의 핵우산 때문에 생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같은 현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북한과 중국의 도전방식이 서로 상이하다는 점이다. 이 시리즈의 제1회 기사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북한은 미국에 직접적 도전을 단행하는 방법으로 중국은 일본과의 경쟁에 나서는 방법으로 모순 극복을 시도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북한은 동북아 모순을 잉태하고 있는 미국의 핵우산에 직접적으로 도전하고 있는 데 비해 중국은 이전에 제대로 결판을 내지 못한 일본과의 재대결을 준비하는 방법으로 자신들이 처한 모순을 극복하려 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중국의 항일전쟁이 제2차 대전에 가려 제대로 빛을 발휘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원폭 투하로 인해 전후 동북아질서가 모순에 빠졌다는 점은 중국이 일본과의 결판에 나서도록 촉구하는 심리적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 5회부터는 중·일 양국이 구체적으로 어떤 쟁점을 놓고 대결을 준비하고 있는지 하는 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가 운영하는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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