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전 엄격한 선생님이 될래요"

학생이 불행한데 교사가 행복할 리 없지요

등록 2006.01.26 11:46수정 2006.01.26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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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엄격한 선생님이 좋아요? 관대한 선생님이 좋아요?”

언젠가 수업시간에 'strict'(엄격한, 혹은 가혹한)란 단어를 설명하다가 아이들에게 던진 질문이다. 아이들의 선택은 당연히 관대한 선생님이었다. 한 아이만이 이렇게 모범생다운 선택을 했다.

“엄격할 때는 엄격하고 관대할 때는 관대한 선생님이 좋아요.”

그것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대답이었지만 출제경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다시 이렇게 물었다.

“그럼 여러분이 만약 교사가 된다면 엄격한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아니면 관대한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엄격한 선생님이요.”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같은 대답이 나왔다. 엉겁결에 대답을 해놓고 화들짝 놀라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바람에 모처럼 교실이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나는 그 웃음소리가 가실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엄격할 때는 엄격하고 관대할 때는 관대해야겠지요. 그런데 그것과는 좀 다른 얘긴데, 여러분이 관대한 선생님을 좋아하는 것과는 달리 엄격한 선생님이 되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게 편하니까요.”


“그래요. 인간은 누구나 자기 편한 길을 찾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저는 여러분에게 관대한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여러분에게 관대한 것이 저에게도 유익이 되기 때문이에요.”

아이들은 내 말이 아리송한 모양이었다. 학생들에게 관대하면 교사가 힘들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인데 무슨 유익이 된다는 것인지. 나는 의구심에 찬 아이들의 눈빛을 신선한 산소처럼 받아 마시며 넌지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아내가 불행한데 선생님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몇 아이는 그렇게 똑 부러지게 대답을 했고, 몇 아이는 까만 눈을 반짝이며 조용히 도리질을 했다. 또 몇 아이는 대답을 유보하고 있는 듯했다. 하긴 그럴 수도 있다. 살을 섞고 함께 사는 사람이 불행해도 나는 행복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럼 학생이 불행한데 교사가 행복할 수 있을까요?"
"…!?"

이번에는 “아니오”란 분명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몇 아이가 나를 바라보며 도리질을 했고, 대다수 아이들은 멀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고, 잠시 후 나는 창쪽으로 걸어가 창문 하나를 활짝 열었다. 학교가 산기슭에 있다보니 창문만 열면 곧바로 산이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산도 없고 나무도 없고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황량한 곳에서 혼자 살아야한다면 얼마나 끔찍할까요? 인간의 행복만이 중요하다고 자연을 훼손하고 동물들을 학대하여 이 지구상에 인간만이 남게 된다면 인류가 행복할까요? 산이 행복해야 나무가 행복하고 나무가 행복해야 새가 행복하고 새가 행복해야 사람도 행복하지요. 이것이 행복의 원리에요. 여러분과 일년 동안 한 교실에서 동고동락하는데 여러분이 행복해야 선생님도 행복하지요. 여러분이 숨도 못 쉬고 불행한데 어떻게 선생님이 행복할 수 있겠어요?”

아이들은 그제야 내 말을 이해하는 듯했다. 몇 아이는 감동을 먹은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기도 했다. 그 중 한 아이의 눈빛이 묘하게 빛나더니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저는 엄격한 선생이 될래요. 선생님처럼 하면 너무 힘들 것 같아요.”

나는 그 아이의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그 아이도 한때 나를 힘들게 한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힘들어 사랑한 줄 알았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는 빙그레 웃으며 아이의 맑은 눈 속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아이의 눈 속을 들여다 본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맑고 천진한 눈이 한 순간이나마 교사를 바라보는 학생의 눈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증오와 분노의 감정으로 가득 찬 적이 있었던 것이다. 사건의 자초지종은 이랬다.

어느 날 쉬는 시간에 볼일이 있어서 교실에 잠깐 들렸는데 두 아이가 서로 눈을 치켜뜨고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이미 한바탕 전쟁을 치른 뒤인지, 아니면 폭풍전야의 탐색전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든 사태가 심각해보였다.

“허허, 이 녀석들 봐라. 이거 심각하네. 야, 애들 왜 이러냐?”

완력으로 뜯어말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닌 듯싶어 가벼운 말로 담임이 와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인데, 두 아이 모두 담임의 존재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시계를 보니 곧 수업종이 울릴 시간이었다. 나는 급한 마음에 좀 더 공세를 취하고 있는 아이의 등을 가볍게 툭 치며 이렇게 말을 건넸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선생님 오시기 전에 일단 수업준비부터 하자.”

바로 그때였다. 그 아이가 심장이 얼어붙을 만큼 차갑고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본 것은. 나는 순간적으로 위기를 느끼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이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한 걸음 물러서서 마치 방관자처럼 잠시 서 있었다. 그 사이 나는 이런 생각을 했을까?

나와 친구처럼 다정했던 아이. 어쩌면 그래서 아무런 제어장치 없이 불같은 감정을 그대로 내뿜었으리라. 아마도 그랬으리라.

그날 나는 그 아이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한 시간쯤 지난 뒤의 일이었다. 아이는 눈시울을 붉히며 진정어린 마음으로 나에게 잘못을 빌었다. 만약 성급한 마음에 한 시간 전에 사과를 요구했다면 그런 선하고 맑은 눈빛을 볼 수 없었으리라. 성장해가는 제자의 모습을 지켜보는 행복도 맛보지 못했으리라.

덧붙이는 글 | 월간지 <사과나무>에도 기고합니다.

덧붙이는 글 월간지 <사과나무>에도 기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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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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