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성벽' 아닌 '쌀 성벽'이 나라를 지킨다

고대 중국의 상소문에 나타나는 식량주권의 중요성

등록 2006.02.23 10:54수정 2006.02.23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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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우루과이 라운드(UR) 이래 쌀시장 개방 문제는 한국 농업의 핵심 이슈가 되었다. 당시 정부는 "향후 10년 정도면 한국농업의 경쟁력이 강화될 것이기 때문에, 지금 쌀 품목에 대해 관세화 조치를 한다 해도 별문제가 없을 것"이라면서 농민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13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한국 농업은 여전히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간 정부가 농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특별한 노력을 했다고 볼 만한 정황도 찾아보기 힘들다.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으로 쌀 개방 문제가 다시 도마 위에 오른 지금까지도, 한국정부는 여전히 10여 년 전의 '향후 농업경쟁력 강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쌀시장 문제는 비단 농업 보호의 문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그것은 식량주권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식량주권'은, 전쟁처럼 대외관계가 악화되어 식량 수입이 곤란해지는 경우에 더욱 더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식량주권의 문제는 고대 중국의 상소문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안으로 다루어졌다. 한나라(BC 202~AD 220) 3대 황제인 문제(文帝) 때에 조조(?~BC 154)라는 인물이 자신의 상소문에서 농업과 식량주권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한 적이 있다. 그의 상소문은 반고가 지은 <한서>에서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참고로, 여기에 나오는 조조는 훗날 삼국시대의 조조와 다른 사람임을 밝혀 둔다.

조조는 중국의 농신(農神)으로 추앙받는 신농(3황 5제의 1인)의 말을 인용하여 "돌 성벽의 높이가 10인(仞)이고 끓는 물로 채운 해자(垓字)의 넓이가 백보이며, 갑옷 입은 군사가 백만이 있어도 식량이 없으면 (나라를) 지킬 수 없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10仞은 지금의 도량형으로 하면 약 18.5m가 된다. 그리고 垓字는 성벽 주위에 파 놓은 못을 말하는 것이다. 해자의 넓이가 백보나 되는데 거기에다가 끓는 물을 가득 채운다면, 적군이 쉽사리 성벽에 접근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돌 성벽의 높이가 약 18.5m나 되고 성벽 주위의 끓는 못이 백보나 되고 갑옷으로 무장한 군사가 백만이 된다 하여도, 국가 방위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식량 주권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첨단 무기가 전쟁에서 사용될지라도 그 무기를 작동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므로, 그 인간을 먹여 살리는 식량이 전쟁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최근 50년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국제질서가 바뀔 때마다 어김없이 발생하는 것은 전쟁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평화가 오래 유지되면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태평성대가 영원할 것'이라면서 전쟁의 가능성을 부인하곤 했지만, 국제질서가 바뀔 때마다 전쟁은 어김없이 발생했다.


그러므로 지난 50년간 한반도에서 전쟁이 없었고 또 첨단과학 시대가 왔다고 하여 전쟁의 발생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이 발생한 상황 하에서도 안정적으로 쌀을 수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위 상소문에는 식량주권 문제 외에도 농업에 관한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다. 상소문에 보면, "사람의 실정(實情)이라는 것이 하루라도 두 끼를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고 일 년 동안 옷을 짓지 않으면 추운 것입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는 당시의 중국인들이 평균적으로 하루에 2끼 식사를 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서양의 경우는 어떠했는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에는 하루에 3끼 식사를 하게 된 것이 불과 100여 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과거에는 하루에 3끼 식사를 하는 것은 특권층이나 부유층에서나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조는 상소문에서 농업을 권장하기 위하여 "곡식을 정부에 납부하는 백성에게 작위를 주거나 형벌을 면제해 주자"는 건의를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농업을 진흥함은 물론이고, 여유분 곡식을 정부가 흡수하여 정부 재정을 확충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서민층의 세금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조조의 생각이었다.

아무튼 이 상소문에서 조조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식량은 통치자의 가장 유용한 도구이며 정치의 본무"라는 점이다. 이 점은 현대 정치에서도 여전히 본질적인 문제일 것이다.

한국정부는 외국의 통상 압력을 자주 거론하지만, 외국의 압력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국가주권의 본질을 내줄 수는 없는 것이다. 부당한 압력이 가해지면 그 앞에서 후퇴할 게 아니라 맞서 싸우는 게 옳은 자세일 것이다.

외국이 군사적 방법으로 압력을 가하면 그에 맞서 싸워야 하듯이, 외국이 비군사적 방법으로 압력(통상압력)을 가해도 그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군사적 압력에 대해서는 저항하고 비군사적 압력에 대해서는 그냥 순응해야 한다는 법은 없을 것이다.

FTA 협상을 준비하는 한국정부가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은, 나라를 지키는 원천적 힘이 첨단무기가 아니라 바로 인간에게 있다는 점이다. 국가방위의 원동력이 인간에게 있기에, 그 인간을 먹여 살리는 식량 역시 국가방위의 원동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를 지키는 데에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18.5m나 되는 높은 성벽이 아니라 바로 높은 '쌀 성벽'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덧붙이는 글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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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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