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381회

등록 2006.03.06 08:08수정 2006.03.06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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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0 장 쾌락지실(快樂之室)

사람은 눈을 가리게 되면 확실히 방향감각이 떨어진다. 더구나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딛고 있었던 바닥이 돌게 되면 방향을 짐작하기는커녕 머리마저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오히려 나았다. 지독한 살기를 띤 금색면구 사내들의 눈빛을 차라리 보지 않게 되었으니까.


후송노인은 광와노인이 부탁한 것을 들어주었다. 살벌한 상황 속에서 눈을 가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지만 거의 반 시진 만에 풀려진 눈가리개는 그들에게 빛에 대한 적응을 늦게 만들었을 뿐 아무런 위험이 없었다.

“천동의 무학을 무시하지 말게. 철혈보는 불완전한 천동의 무학으로 이백년 동안 무림의 최고문파의 위치를 고수해왔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독고대제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재질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오룡번의 무학을 익히면서 불완전하다고 판단했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이 인간의 본성을 잃게 될 것이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철혈보를 세운 뒤 십오 년 동안 두문불출하며 모든 힘을 쏟은 것은 바로 오룡번의 무학을 완성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완벽하게 해내지는 못했다. 단지 익히는 자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수정을 하고, 상승의 단계에 이르는 과정 속에 잠재되어 있는 불완전한 단계를 과감하게 폐기했던 것이다. 허나 그 정도만으로도 철혈보는 이백년 동안 천하제일문파의 위명을 지킬 수 있었다.

“무학이란 그 단계나 익히는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어느 수준에 이르면 다 똑같은 것이 아니겠소? 문제는 익히는 자의 재질과 노력에 달린 것이라 생각하오.”


“자네 정도라면 할 수 있는 말이겠지.”

석로(石路)는 마치 칼로 깎아낸 듯 제법 사각형의 틀을 갖추고, 일정한 간격으로 유등까지 밝혀져 있어 매우 잘 만들어진 통로였다. 바닥 역시 청석을 깔아놓아 걷기 매우 편안했다. 이곳은 천연동굴이 아니라 확실히 인공으로 만든 동굴이었다. 더구나 백결은 이미 이 석로를 매우 잘 아는 듯 그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중원에서 그렇게 말할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을 걸세.”

백결의 지적에 담천의는 쑥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무심코 대답은 했지만 사실 주제넘은 대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다 온 것이오?”

“얼마 남지 않았네. 이 석로를 따라 일각 정도만 걸어가면 천마곡이네.”

그 말에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멈췄다.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그들의 처지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들어올 때는 분명 동료라 할 수 있었다. 허나 천마곡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하나는 제마척사맹의 맹주로 내정된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내심이야 어찌되었든 천마곡의 일원이다. 천마곡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들은 칼을 맞대야 할 처지인지 모른다. 더구나 두 사람이 함께 천마곡에 들어가는 모습을 다른 이들이 보게 되면 어떻게 생각할까?

백결로서는 또 한 가지 걱정이 들었다. 과연 현재 천마곡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셋째가 지금까지 대사형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을까? 셋째가 천동과 관련이 있다면 이미 모종의 움직임을 보였을 것이다.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뜬금없이 부탁이라니....? 담천의가 걸으면서 백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백결은 앞만 보고 걸을 뿐 그를 보지 않았다.

“나 역시 노력하겠지만 자네가 내 사형제와 다투지 않기를 바라네. 특히 내 사형인 장철궁과 강명 사제와는 나중에라도 맞닥뜨리지 않기를 부탁하네.”

사실 이루어지기 어려운 부탁이다. 담천의는 제마척사맹의 맹주, 장철궁은 천마곡의 곡주다. 이후의 일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백결로서는 애써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부닥친다면 양쪽 다 크게 다칠 터였다. 백결은 누구도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노력해 보겠소.”

담천의의 대답에 백결은 그제서야 그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떡였다. 무리한 부탁이었고, 대답은 담천의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대화가 끊기고 그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할 때였다.

“담대협이신지요?”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모퉁이를 돌자 한 소녀가 사뿐히 몸을 낮추며 인사를 했다. 매우 앳되어 보여 이제 겨우 십사오세 정도로 보이는 앙증맞은 소녀였다. 하지만 몸에 달라붙는 노란 화복(華服)을 입고 있었는데 어린 소녀답지 않게 제법 가슴과 허리의 굴곡이 뚜렷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렇소만....”

“이곳의 주인마님께서 담대협을 청하셨사옵니다.”

그 말에 백결이 불쑥 말을 던졌다.

“지금 네가 말하는 주인마님은 유항이겠지?”

“나리를 청하신 것은 아니옵고 오직 담대협 한 분만을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이제 유항이 직접 나서겠다는 말이로군. 가지 말게. 선자불래(善者不來) 내자불선(來者不善)이라 했네.”

선한 자는 오지 않고, 온 자는 선하지 않다는 말이다. 무림에 떠도는 이 말은 자신을 찾아 온 자는 반드시 뭔가 목적이 있어 찾아왔다는 것으로, 무림에서 찾아올 목적이란 좋은 일보다는 대부분 나쁜 일이 있어 찾아왔다는 의미다.

“내가 반드시 낭자의 주인마님 청에 응해야 할 이유가 있소?”

“당연한 말씀이옵니다. 중요한 일이 없다면 어찌 담대협을 청하겠사옵니까?”

“불러들여 죽이겠다는 일 외에 무슨 일이 있겠느냐?”

백결이 냉소를 치며 말을 밷자 담천의가 마음이 변할까 두려운지 소녀는 백결을 상대하지 않고 얼른 말을 이었다.

“주인마님께서는 이 말씀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담공자의 형제 분 중 한 분을 모시고 있으니 오셔서 데리고 가시라고 하셨습니다. 더구나 사내도 아닌 여인의 몸이라......”

그녀의 말에 담천의는 퍼뜩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신음처럼 한 마디 내밷았다.

“산산....!”

소녀가 말한 자신의 형제란 분명 남궁산산이었다. 연동으로 같이 들어온 남궁정천을 만난 적도 있지 않은가? 한 순간 그의 뇌리에는 여러 가지 상념에 복잡해졌다. 남궁정천은 무사히 연동을 빠져나갔을까?

남궁산산 일행이 같이 동행했던 무림인들과 개방의 홍칠공(洪七公) 등은 어찌 된 것일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문득 우교 생각도 떠올랐다. 우교는 자신이 남긴 표식을 보았을까? 자신의 뒤를 따라왔을까? 사실 표식이라 해보았자 원형의 석실에 남긴 것이 마지막.

“산산 혼자인가?”

“소녀는 그저 말씀만 전할 뿐이옵니다.”

“함정이네.”

담천의의 모습에 백결이 정신을 차리라는 듯 침중하게 말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허나 함정이니 어쩌란 말인가? 형제가 상대의 손에 잡혀 있음을 알고도 모른 척 하란 말인가?

“이 쪽을 따라 가기만 하면 천마곡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오?”

“그렇다네. 허나 사람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네 몸이 어떤지 생각해 보게.”

이미 마음을 굳힌 담천의에게 백결이 다시 말했다. 담천의는 왼쪽 어깨부터 왼쪽 팔까지 아예 쓰지 못하는 상태다. 정상적인 몸이 아닌 상황에서 사람을 구하기는커녕 당하지 않겠느냐는 의미. 허나 담천의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나를 청하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고, 그녀가 어떠한 간계를 꾸미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실수하는 거요.”

형제를 두고 갈 수는 없다. 담천의의 얼굴에 이미 마음을 정한 듯한 표정이 떠오르고, 미세한 살기마저 흐르자 백결은 탄식했다.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다. 백결은 전음을 보냈다.

“천마곡 안에서 나를 찾을 일이 있다면 검은색 천에 흰색으로 하(霞)자를 써서 걸어놓게. 나 역시 자네를 찾을 일이 있다면 흰색 천에 검은 글씨로 령(嶺)을 써 걸어놓겠네.”

송하령의 하와 령자는 그들 두 사람 간의 끈이다. 담천의가 고개를 끄떡이자 백결이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담천의는 슬쩍 시선을 돌리며 그곳 석벽에 우교가 볼 수 있는 마지막 표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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