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정통무협 단장기 382회

등록 2006.03.07 08:10수정 2006.03.0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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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한 사과에도 불구하고 모용화궁의 냉랭함은 가시지 않았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무림인에게, 특히 자존심과 명예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무림세가의 가주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명예를 실추시키고, 모욕한 것은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찌하면 가주의 화가 풀리시겠소?”


구효기의 말에 모용화궁은 자신의 거처에 온 인물들을 쭉 훑어보았다. 무당의 장문인인 청허자와 철혈보의 보주 독고문을 대동한 것은 혹시나 자신의 노화로 일이 악화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방패막이일 것이었다. 정작 자신에게 볼 일이 있는 사람은 구효기와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몽화라는 여인이 분명할 것이다.

회의석상에서 자신을 완벽하게 궁지에 몰아넣고 확인하고자 했던 것도 구효기와 저 여인의 생각이었을 터. 그들의 의구심을 모를 바도 아니었고, 저들이 사과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을 찾아온 이유도 짐작하지 못할 바 아니었다.

어차피 말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라면 지금 이 시기도 나쁘지 않았다. 언제나 마음에 걸리던 일 한 가지를 매듭지으려면 오히려 지금이 기회일 수도 있었다. 그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본 가주는 알고 있는 사실이 많지 않소.”

밤이 이슥해서 찾아온 사람들의 의중을 찌르는 한 마디였다. 모용화궁과 시선을 마주친 구효기가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허나 차라리 용건을 말하기도 전에 모용화궁이 먼저 말을 꺼내자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우선 맹(盟)에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모용화궁은 청허자와 독고문을 보았다가 다시 구효기를 보았다. 그것은 제마척사맹을 이끌고 있는 수뇌부에 대한 부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어떤 부탁이신지..... 본 맹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모용가주께 사과하는 의미에서라도 노력해 보겠소.”

구효기가 미안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대답하자 모용화궁은 갑자기 탄식을 내쉬었다.

“휴우,,,, 염치없는 부탁인지 알고 있으나.......”

차마 말을 꺼내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모용화궁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숙이며 겨우 입을 열었다.

“본 가주의 못난 자식만큼은 한 번 살려주시오.”

모용화궁의 말에 좌중은 일제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띠었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자신의 아이를 살려달라니..... 모용화궁이 못난 자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은 하나뿐이다.

“모용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구양휘 역시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모용화궁이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다네. 그 아이를 말함이네.”

그 말에 더욱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었다. 갑자기 모용수를 한 번 살려달라니.... 이곳에 있지도 않은 모용수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렇게 간곡하게 살려달라고 하는 것인가? 그때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몽화가 슬며시 물었다.

“모용공자는 모용화천을 백부로 인정했군요.”

모용화궁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몽화를 바라보았다. 대단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낭자의 말이 옳다네. 그 아이는 오래 전부터 모용화천과 관계가 있었지.”

구양휘의 안색이 홱 변했다. 모용수는 그의 형제다. 그런 그가 모용화천과 오래전부터 관련이 있었다니 믿기 어려웠다. 형제라면 서로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 속이는 것은 형제의 의리를 배신하는 행위다.

그러고 보니 모용수는 중원정세나 정보에 매우 밝았다. 중원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게 없었다. 아무리 모용세가가 무시하지 못할 무림세가라 하지만 그 정도의 정보망이 있다고 믿기 어려웠다.

“그 아이 뿐만이 아니었소. 본 가의 식솔들 중에서도 모용화천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 짐작되오. 연자광이 모용화천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이번 사건으로 알았소.”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속이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모용화궁의 얼굴 한켠에는 근심이 서린 어두운 기색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간혹 보이던 저런 어두운 모습이 무엇 때문인지 알 것도 같았다.

“왜 가만히 두시고 계셨나요? 이미 짐작은 하셨을 텐데.....”

“어찌 가만히 있었겠나? 본 가주는 모용화천과 만나거나 관련이 되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겠다고 공표를 했다네. 그러자 표면상으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지. 은밀하게... 마치 중독성이 심한 앵속처럼 퍼져나간 것이라네. 수년 전에 그러한 사실을 알았지만 이미 늦은 것이지. 그래서 이번도 최대한 믿을만한 사람들만 데리고 맹에 합류한 것이네.”

“좀 더 확실하게 말씀해 주시겠소? 어떻게 그런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는지..?”

구효기가 답답한 듯 끼어들었다.

“모두 아시다시피 모든 것은 사실 선친(先親)으로부터 비롯된 일이오. 물론 더 파고들자면 조부(祖父)께서 확실하게 선을 그어놓으셨기 때문이기도 하오.”

모용화궁의 조부는 모용화천이 모용가의 핏줄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혔다. 가주의 말은 그 가문에서는 곧 법이다. 모용화궁의 부친을 비롯하여 모용가의 식솔이라면 역시 따를 수밖에 없는 일. 문제는 부친마저도 확실한 믿음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선친 생전에 모용화천은 두세 차례 본가를 방문했던 것으로 기억하오. 하지만 선친께서는 끝내 당신자식임을 인정하지 않으셨소. 오히려 본 가주에게 엄하게 당부하셨소.”

“............!”

“모용화천은 모용가의 핏줄이 아니다. 선친은 그런 자식을 둔 바도 없고, 차후에라도 절대 인정하면 안 된다. 선친께서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말씀하셨소. 아마 모용화천이 본 가에 크게 해를 입힐 것이라 생각하시고 계신 것 같았소.”

“모용가주께서도 모용화천과 두 번 만나신 적이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몽화의 질문에 모용화궁은 고개를 끄떡였다.

“선친께서 타계하신 후 모용화천이라고 하는 사람이 두 번이나 본 가를 방문한 것은 사실이네. 본 가주는 다른 식솔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독대(獨對)했지. 그의 요구는 여전히 한 가지였네. 자신이 모용가의 핏줄임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지.”

모용화궁은 입술이 마르는 듯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모용화천이 천지회의 회주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을 걸세. 천지회의 이름으로 위협까지 하더군.”

“............!”

“허나 어찌 그것을 본 가주가 인정할 수 있었겠나? 조부와 선친께서 이미 확고하게 결정하신 사실을 번복할 수는 없는 일이었지. 아마 본 가주가 확신을 하더라도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네.”

“모용화천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시는 유일한 분이시군요.”

몽화의 말에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일제히 한 가닥 기대감이 떠올랐다. 모용화천의 정체는커녕 모습조차 알려지지 않았지 않은가?

“낭자의 생각은 틀렸네. 본 가를 두 번씩이나 방문했던 모용화천은 절대 모용화천 자신이 아니었네.”

“어찌.....?”

“본 가를 방문했던 모용화천은 균대위에 의해 죽음을 당했지. 당시 본가에는 가정(家丁)으로 일하던 균대위 소속의 인물이 있었다네. 가내의 일이 균대위 쪽으로 알려지는 것은 원치 않았지만 비원의 명이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지. 그 당시 균대위에서는 모용화천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 같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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